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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an 09. 2021

50세, 난 자유다

광고회사 25년, 출구 찾기 진행 중

90년대 초반, 노래방이 처음 인기를 끌던 시절.

지방 출신에, 집안 어렵고 세상 진지한 스타일의 남자들이 득시글하던 S대 사회학과에 다니던 나는 

노래방에서 주로 그들과 함께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불러 댔다. 

말미에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고음부가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노래로, 

그 칙칙함이란 가히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띠에 게자리, A형

소심하고 책임감 강하고 충직하다에 해당되는 모든 요소들의 집합체인 그 성격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미완의 인생을 어떻게 잘 채워 나갈지 부담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던 것 같다.


자기 방어의 기재였을까.

그 당시 친구들이 고민 끝에 선택하던 기자나 피디, 법조계, 행정고시를 통한 공무원 등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감을 요구하는 직업을 거부하고 엉뚱하게도 광고회사를 선택했다.

사회학에서 배운 사회조사, 계층 연구 등과 직업적 연관성도 있었고, 적당히 재미있어 보였고, 

보수도 낮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광고회사가 매우 신선하게 떠오르는 미래형 유망 직종이어서 

주변 인식도 괜찮았다.


하지만, 광고회사에서 일하면서도 내 업무 스타일은 대체로 진지하고 논리적이었다. 

때로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광고회사란 것이 아이디어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설득 작업도 꼭 필요한 업무 중 하나였으므로, 직업을 유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좀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알고 보면 츤데레 같은 면모도 있었으므로 가깝게 지내는 동료, 

따르는 후배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광고회사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주변에서 같이 일하는 선배, 후배, 동료들의 발랄한 에너지 덕분에

비교적 자주 웃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혼자 있으면 한도 없이 진지해지는 스타일이라,

모여서 같이 '어떻게 하면 뻔해지지 않을까?'를 연구하는 회의 자리가 힘들지만은 않았다.

앉아서 같이 머리를 짜내다 보면 뭐라도 아이디어는 나왔고,

광고주에게 결코 빈손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우리 일이라는 게 결과는 복불복,

우리 작업의 퀄리티보다 광고주 내외부 상황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대단한 책임감보다는

무게감을 덜고 우리 감에 충실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더 성공률이 높았다. 

그러니, 결국 타고난 딱딱함보다는 힘 뺀 자유로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던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

임금 수준도 낮지 않아서, 앞서 말한 직업을 선택한 친구들과 비교해도 크게 빠지지 않았다.

20,30대까지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드니,
20대 초반에 느꼈던 그 막막한 삶의 무게감이
다시 짓눌러 오기 시작했다.


업의 특성상, 국가에서 법으로 보장하는 60세 정년보다
훨씬 짧을 것이 분명한 나의 직업 수명은 50세도 어려워 보였고,

회사를 옮겨도 어차피 몇 년 차이일 뿐
획기적인 생명 연장의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일을 핑계로 그다지 살뜰하게 돌보지 못하고 방목하다시피 한 아이들은

이제 10대 초반을 지나 입시를 고민해야 하는 문턱에 서 있었다.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강남 엄마의 아이들과 한판 피 터지는 입시 경쟁을 치러내야 하지만, 

직장맘이라는 허울로 아무것도 신경 써주지 못한 엄마 덕에 선행학습과 외국어 학습 같은 

비밀병기는 아무것도 없이, 심성만 착한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 외국어 공부라도 시키자

하여 어렵사리 마련한 중국 주재원 자리.

해외 지사가 있는 회사에 다녔기에 가능했던 행운이었다. 


그리고, 2013년 마침내 중국 주재원 부임. 

이런저런 계산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매우 심했다.

업무 성과나 생활 태도 모든 면에서 왠지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느낌. 

중도 귀국은 절대로 안 된다는 당위성이 목을 졸랐다. 

처음 1,2년 동안은 중압감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첫 해 몸무게가 단번에 3킬로 빠졌다.


하지만, 만 4년이 경과하는 시점에 큰 아이가 목표로 했던 대학 입시에 성공하고 

둘째도 대학 입시 특례 혜택을 받을 자격을 채우자 돌연 이 중압감이 가벼워졌다.


중국에 온 이유 중 가장 우선순위의 두 개가 채워지고 나니까,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서 스르르 벗어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는 돌아가도 좋겠다 라고 생각한 시점에 마침 회사에서 귀임을 권유했다.

오케이

어차피 중국에서의 5년 시간 동안

업무를 대하는 생각의 폭과 깊이는 더해졌지만 감은 무뎌졌고, 무엇보다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나에게 맞는 새로운 옷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돌아와서 또 어떤 삶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중압감이란 어차피 시점을 두고 또 왔다가 그리고 다시 또 가겠지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3년을 존버 했다. 


진급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임하면서, 중국 마케팅 경험을 살려 책을 냈고,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근무시간에는 일을 하고, 근무가 끝나면 공부도 하고 글도 쓴다. 

주 52시간제 덕분이다. 고마운 나라고, 고마운 회사다. 


광고회사 25년, 나이 50세. 

이제는 정말 끝이 보인다.


야호, 난 서서히 자유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미래를 응원하며 by 윤혜연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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