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씨 Jan 09. 2021

마케팅 바닥, 재능없이 존버하기

광고회사 25년, 출구 찾기 진행 중 #2

광고 회사 25년, 이제 업의 전문가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사람을 보면 대략 견적이 나오는 법이다. 

음, ‘잘하겠’군 아니면 ‘좀 안 어울리는데?’


그런데 이제 보니 나는 광고나 마케팅에재능이 없는 것 같다. 

아이러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돌아보고!

이제서야, 내가 이쪽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다니.


와우

그러고 보면, 나의 적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고3때대학 진학을 고민하던 무렵부터 시작해서 근 30년이나 이 고민이 이어졌다. 

일의 결과가 좋고 인정을 받을 때면 괜찮은건가 싶다가도, 

숱하게 마주치는 경쟁 상황에서 안 좋은평가를 받으면 금새 기가 죽곤 했다. 


마케터로서 나에 대한 근본적인 자신감이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고집이 세지 않다는 점. 

내 의견대로 논의의 흐름을 끌고 가기 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만들어 내는 것에 만족을 하고 만다. 

그러면,결국 나중에 실행이 되더라도 내 업적으로 남지 않는다. 

“한방이 없는 수비형 마케터다” 이건 이 업계에서는 한 마디로 별로라는이야기다.


게다가 급진적인 생각을 별로 하지 못한다. 

대체로 나는 기존의 질서, 기존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조금 고쳐서 쓰자 주의이지,

확 고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자라는생각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별반 생색을 낼 줄도 모른다. 

자고로 조직 생활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자리는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자기가 한 것을 잘 포장하고, 같은 말을 여러 번 질리도록 반복하면서 

주변에 존재감을 각인시킬 줄 아는, 소위 자기애가 강한 사람에게 훨씬 유리하다. 

더구나, 말빨 센 사람이 즐비한 광고회사임에랴. 


워라밸을 중시한다는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나는 정시 출퇴근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갑작스런 일정 때문에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아니라면 야근을 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야근을 하지 않도록 미리미리걱정하고, 대안을 마련해 놓곤 했다. 

그리고,내가 싫어하는 만큼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분명 싫어할거야 라는 전제를 가지고 

되도록 야근을 안 하게 배려해야 한다는강박 관념 같은 것이 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분명히 노라고 해서 야근을 하더라도 다른 대안을 찾도록 해야 하는데, 

근무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을 만큼만 수정시켰다. 

이런 마인드, 이 바닥에서 아주 안 좋다.


가장 나쁜 것은 남의 것에서 너무 쉽게좋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원래 설득이란 건,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 그러니 내 말을 따르라 라는 단순한 명제로 정리돼야

힘이 실리는 법이다. 그런데 나의 뇌 구조는 천성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따르는 편이다. 

네 생각도 옳고 내 생각도 일리가 있다. 

그러니,이런저런 정도의 작은 수정만 하고, 어떻게든 서로 좋은 결론을 내자라는 식이었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생각의 회로 자체는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니,거꾸로 생각하면 이 업종에 맞는 사람의 조건이 나온다. 

고집 세고, 급진적이고, 생색 잘 내고,
본인뿐아니라 남의 워라밸 적절하게 무시할 줄 알고,

끝까지 내 생각을 우길 줄 알아야 한다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니다. 

광고 마케팅 바닥이란 진입장벽이 낮고 누구나상식 선에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초심자라도 우연찮게 괜찮은 아이디어를낼 수 있는 꽤 오픈된 마켓이다. 

이런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요즘 경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래퍼들처럼

전투적이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내 영역을 지킬 줄 아는, 강한 멘탈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

이렇게까지 안 맞는다고 하면서,
그럼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25년을 버텼지?


그래

사실 나는 나만의 필살기가 있었다.

“마케팅 내, 써브 영역을 집중 공략하는 것”

20여년 전, 갑자기 글로벌로 진출하는 고객사가생기면서 영어를 잘 하는 마케터가 필요했다.

비록 외국 MBA 출신은 아니었지만, 과감하게 영어에 도전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외국어 생활관에 들어가서10주간 외부 생활을 잊어버리고 영어에만 몰입했다. 

결과는1등 졸업. 회화 1등급도 땄다. 

마케터들은 많았지만, 영어 잘 하는 마케터는 많지 않던 시절이라, 한 10년은 유효했다. 


그 강점이 희석될 무렵, BTL 마케팅 바람이 불었다. 

광고가 아니라 이벤트, 리테일 등 고객 접점에서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 마케팅이 중요하게 떠올랐고,

아직 그 분야의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무조건 손을 들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했다. 

대단한 전문가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분야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꾸준히 큰 일들이 생겼다.


그 무렵 중국 시장이 갑자기 떠올랐고, 역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마케터는 희소했다. 

적극 어필해서 중국 주재원의 기회를 갖게되었다. 

다시 외국어 생활관에 입소했고, 한 달 만에 회화 3등급을 따고 나왔다. 

그리고 중국에서 5년간 남들이 하지 못하는 진귀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었다.


결국 나는 경쟁이 치열한 영역에서 치고받는 정면 승부보다는, 

아직 경쟁이 덜한 영역을 새로 만들고 개척하는게릴라 전을 선택한 셈이었다.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 놓고 피 튀는 경쟁보다는 맨땅에헤딩하는 쪽이 더 적성에 맞았다. 

마케팅도 분야가 많다. 

떠오르는 분야 중 나에게 맞는 것을 잘선택해서
그 영역의 전문가가 되면 된다, 꾸준히


그럼, 이제앞으로는? 

음!!

최근 새로운 분야를 찾았다. 관광 마케팅. 

아직 제대로 산업화되지도 않았고, 연구도 많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 산업구조 상, 분명 중요한 영역으로 클 수밖에 없는 분야다. 

현장 마케터가 될지, 연구자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생은 그 의미를가진다 

어릴 때 좋아하던 한 만화 작가가 말했었다. 

이만큼 산 다음에 생각해 봐도, 그 말은 진리다. 


새로운 분야에 늘 열려 있는 이 마케팅이라는바닥, 

그게 좋아서 난 지금껏 재능도 없으면서

여기에 추근추근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고민하다 중국을 선택한 순간 by 윤혜연작가님


이전 10화 50세, 난 자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