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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Apr 12. 2023

#현실자각 3탄 _ 머슴의 전성기

꿈꿔오던 사장 놀이 개시

대표가 눈 감아버리면 너무 쉽다


신기하게도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비슷한 것 같다.

틈만 나면 모아 놓고 훈시,

내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 착한 직원 챙겨주기,

나에게 뻣뻣하고 토 다는 직원에게 본때 보여 주기,

조직도 내 마음대로 그리기.

한 마디로 “사장놀이”다.


만약 대표가 이런 사장놀이를 별로 즐기지 않고,

그 기회를 아랫사람에게 양도한다면

이건 그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대단한 기회임에는 분명하다.


내 돈 들여 만든 회사도 아니고,

내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 마음대로 사람들과 조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다니 말이다.


한편, 대표 입장에서는 험한 소리 다 알아서 해가면서

자기 일처럼 열심히 돈을 벌어서 바치는 머슴의 존재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돈만 벌어 준다면, 와이 낫? 땡큐


직원들이 불법이라고 신고하지 않는 선에서

좀 세게 다루더라도 그건 경영 스타일일 뿐.

그런 것까지 간섭해서

열심히 일하는 머슴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은 거다.


환장의 조합이다




연말 고과 피드백, 전대미문의 사건

 

조직원 전체가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무릇 연말 고과라는 것은

본인 스스로 평가, 그 위 보직장들 평가 순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보직장들이 대상자를 면담하면서

“스스로 평가”와 “윗사람 평가”를 비교한 결과를 바탕으로

잘하는 부분,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피드백을 주게 된다.


그런데, 한참 고과를 취합한 우리 최고 머슴님께서

격앙해서 팀장 이상 모든 보직장들을 불러 모았다.


“아니! 어떻게”라고 시작한 모두 발언은

“매출이 이 지경인데, 자기 평가를 이렇게 높게 해”

“대표님이 우리 평가를 79점이라 했는데, 어떻게 그것보다 더 높게 스스로를 평가해”

“그렇게 잘 난 사람이면 이런 회사가 아니라 대기업으로 가야지” 등

거의 인신 공격성 발언으로 이어진 다음,


결국 마무리는,

“무조건 79점 이하”로 자기 평가를 다시 하란다.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회사 매출이 목표를 달성 못했더라도, 각 부서의 직무 평가는 각자 다를 것 같다.

 매출의 못 미친 부분은 모든 부서에 웨이트를 줘서 일괄적으로 내리면 되지 않나?”라는 요지로.


하지만,

눈에서 불을 뿜을 듯이 사람들을 째려보더니

단호하게 한 마디 던진다.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
 내가 한참 모자라다는 반성 없이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직접 자기 손으로 자기비판을 하라는 말씀.

공산당 시대, 자아비판의 현대판 환생인가.


혹자는 분노에 차서,

혹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뿔뿔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밖에.




그리고 이어진, 개인면담을 가장한 언어폭력


다음 날부터 흉흉한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평소에 눈 밖에 났던 몇몇을 회의실로 불러서, 할 말 못 할 말 해가며 모욕을 줬다는 거다.


“네가 하는 일은 한 달 된 인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뇌 구조가 이 일과는 맞지 않는다”

“원래 이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미에는 선심 쓰듯이

“한 달간 시간을 줄 테니,

그 사이에 더 나아졌음을 증명하던지 나가던지 선택해라”라고 했단다.


그 외에도,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한

다른 부서의 직원들의 퇴직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능력이 없건,

말을 안 듣건,

태도가 안 좋건,

모든 판단은 그 최고 머슴의 결정에 딸린 모양이었다.


그 아래 보직장들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들 밖에.

용기를 내어 대표님 면담을 해도

“직접 일하면서 평가하니까 정확하게 봤겠지”라고 두둔을 하고,

면담 분위기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다 하여도

“원래 말버릇이 그런 걸, 한두 번 겪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한다.


아무래도 머슴의 전성시대는 꽤나 갈 모양이다.


그가 결정적인 실수를 해서 책을 잡히거나,

대표가 바뀌거나,

회사가 팔리지 않는 한.


그리고, 신기하게도

직원들은 그렇게 금방 이직의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다.

다만, 담배 피우러 나간 사람들의 대화 시간이 점점 길어질 뿐이다.


언젠가 끝은 오겠지.

누군가 말한 것처럼.

언젠가 나는 짤리고, 회사는 망하며, 우리는 모두 죽을 테니까.


새로운 회사에서 일한 지 1년이다.

철 모르던 온실 속의 화초가 뭔가 세상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놓치는 않는다.


이직 혹은 커리어 전환을 모색하는 틈틈이,

그래도 밥값은 해야 한다는 기특한 성실함과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충실히 출근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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