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2. 음/주(잘 먹고 즐겁게 마시는 이야기)
독립적인 여성을 꿈꾸던 소녀시절 ‘런어웨이 브라이드’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 줄리아 로버츠가 결혼식 날만 되면 웨딩드레스를 입고 도망친다.(3번? 대단하다..) 남자친구에게 맞추느라, 본인이 계란을 완숙으로 좋아하는지 반숙으로 좋아하는지 모르는 그녀. 결국 그녀는 자아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 영화는 어린 나에게 ‘주체적인 삶을 사는 여성이 될 거다’라는 결심을 심어준 작품 중 하나다.
바람처럼 자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한 나는, 확고한 취향을 유지했다. 남편에게 “반반숙으로 익힌 계란프라이나 찐계란”을 요구한다. 노른자가 줄줄 흐르는 브런치 스타일의 계란은 비리고, 딱딱하게 익은 계란은 퍽퍽해 싫다. 그래서 노른자가 터프하게 익어 퍽퍽하지 않게, 새침하게 익어 흐르지 않는 반정도 익은 것이 내 스타일이다. 이 요구를 맞추기 위해 초록창을 검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착한 내 남편이다.
그렇다. 나는 내 취향을 당당히 요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았다.
나의 취향은 미듐으로 익힌 고기, 날것의 회와 해산물, 얼큰한 짬뽕 국물이다. 하지만 고기는 웰던, 회와 해산물은 연중행사, (고춧가루베이스는 언감생심)미역국, 소고기뭇국과 같은 맑은 국물이다.
가장 힘든 건 생선구이를 먹을 때다. 누가 어두육미라고 했나. 놉! 뭐든지 가운데 살코기가 최고다. 아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주다 보면 내 차례는 지느러미나 대가리 쪽에 붙은 살이다. 가시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는 초집중 노동이다. 그래서 노동주를 찾게 된다.(술을 찾게 되는 핑계는 정말 끝도 없지만..) 고추냉이를 찍은 생선찌끄러기들과는 청하가 최상의 비린 맛 잡기 콤비가 된다.
아이들은 날것을 먹을 수 없으니 집에서 고기 요리가 주를 이루고, 외식 메뉴도 늘 아이들 위주다. 두 가지 메뉴를 따로 주문하기엔 지갑이 부담된다. 이래서 나 어릴 적에 그렇게 갈빗집만 갔나 보다.
울 아빠는 초장에 찍은 회 한 점을 얼마나 갈망했을까...
울 엄마도 ‘생선은 대가리가 맛있다’며 뼈사이 살을 쪽쪽 빨듯이 먹었는데...
왜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가 큰 오류인지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육아휴직을 마치고 동료들과 식사자리에서 코다리찜이 나왔다. 뻘겋지는 않지만 매콤한 간장소스와 생선살 덩어리라니.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동료들은 왜 저래하는 눈치였지만.
그래서 지금도 집 밖 모임에서는 내가 갈망하는 매콤하고 날것의 음식을 찾는다.
어제도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1차로 닭볶음탕에 소주, 2차로 참치회에 정종을 나란히 즐겼더랬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육아는 몇 년간 내 취향, 내 욕구를 뒤로 미루게 하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을 잃어선 안 된다고 다짐한다. 취향은 자아의 속집합 같은 요소이니깐. 낮은 출산율을 조장하는 말만 지껄인 것 같다. 여러분 절대 아닙니다!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기쁘고 감사하게 알코올로부터 몸을 멀리하게 되는 시기도 갖게 된다. 아이들이 있으니 ‘우리’라는 울타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건강에 관심도 더 갖고 실천하게 된다. 확실히 나 같이 기분파인 사람에게는 가족을 형성한 것이 잘한 일임에 분명하다.
내 입맛이 잠시 외출해도 괜찮다. 돌아올 곳을 잃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