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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이 Jan 13. 2023

안녕! 내 이름은 대굴대굴 대가리야!


*

 장마가 왔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밖을 쏘다니면 코 안으로 싸구려 습식 사우나 냄새가 난다.

"참 덥다 더워"

 대학생이 된 모아이의 두 번째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봄은 한철이었고 성인이 된 기쁨도 봄 마냥 한철만에 저버렸다. 짧은 봄이 가고 지루한 여름의 개시를 느끼며 걷고 있다. 모아이는 빼미라는 친구 집에 가고 있다. 그에겐 여름방학에 놀 친구가 빼미 밖에 없었다. 왜냐면 대학 동기들 중 이 두 놈만이 놈팡이 마냥 놀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부모 밑에서 아기새 마냥 빌붙어 먹는 버릇이 한 해만에 고쳐먹기가 쉽지가 않아, 결국 모아이는 올해 여름도 놀고먹고 있다. 하지만 없는 주머니 사정에 움직이면 배 꺼질라 그저 땅바닥에 등 붙이고 사는 모아이와는 다르게, 빼미는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음료수 회사 회장이라서, 그 덕으로 31평 아파트에서 자취하며 팔자 좋게 여름방학을 지내고 있다.

"안녕"

"어 들어와"

 하도 자주 보는 바람에 둘은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고 인사를 한다. 빼미는 작고 통통한 몸에 동그란 안경을 쓴, 마치 그 모습이 올빼미 같은, 그래서 별명이 (올)빼미인, 남자 다운 구석이 별로 없는 사내이다.


올빼미의 알은 동그랗다.


 넓은 집이 쾌적도 하고 놀기도 좋기에 모아이는 빼미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게다가 빼미네 집에는 꽤 좋은 사양의 컴퓨터가 두 대나 있었다. 컴퓨터 두 대에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는 것이 이들의 생활이었다. 둘은 별말 없이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한다. 별다른 대화는 없다. 에어컨은 씽씽 불고 게임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남자 놈들이 노는 그림은 이것뿐이다. 둘 다 그렇게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게임 말고 낙이 있다면, 담배나 술을 좀 배워 재미 좀 조금 보는 것이 다였다. 낭만과 설렘의 허상 뒤에 찾아오는 씁쓸함에 그저 컴퓨터 화면 안의 적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애써 까먹는 것이다. 그 역시도 그런 삶이 불안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몇 년 후에 군대도 다녀오고 취업도 하면 남들처럼 알아서 어떻게 되지 않을까란 천덕스런 상상만 할 뿐이다.


 이렇게 나태한 삶에선 더욱이 여자랑 연애 한 번 해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법이다. 여자랑 연애만 하면 인생이 달라질 것 같은 기대감, 내 삶에 서사가 쓰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모아이는 MZ세대 답지 않게 그 나이 먹도록 여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도 없기에, 더욱 여자에 대한 기대가 커져만 갔다.

'여자 친구 없는 놈은 빼미와 나뿐이구나'

 당장 입학할 때만 해도 평생 여자 손 한번 안 잡아본 동기 사내놈들이 수두룩 했지만,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다들 여자 친구를 만들었고 그렇게 남은 놈이 빼미와 모아이 둘이었다. 그렇게 까칠한 사내놈들이 연애질을 시작하자 여자 앞에서 아양을 떨고 멍청하게 실실 웃는 꼴을 보고 실소를 나누던 빼미와 모아이였다.


 허나 모아이는 그 친구들이 부럽긴 했다.

'나에게도 친절하게 말 붙여주는 여자가 있다면!'

 모아이는 여자와 눈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남중 남고를 나온 모아이로써는 여자들이 말할 때마다 생글생글 웃어주는 모양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그런 모습을 한 여자에게서 독차지해서 자기만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쉬이 오지 않았다. 여자란 생물들은 모아이가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오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외로움이란 껌을 단물이 빠질 때까지 곱씹는 것뿐이었다.


 게임 한 판이 끝났다. 게임에 져서 빼미는 궁시렁 궁시렁 모아이에게 핀잔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 알겠다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 화장실 좀 다녀올게"

 빼미는 부유하게 자라서 그런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저렇게 툴툴거리는 것이 버릇이었다. 저러니까 연애를 못하는 것이지 않을까 모아이는 짐작하였다. 그는 매일 빼미와 같이 있으니 자기도 여자 친구가 안 생기는 것이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저렇게 모자란 놈과 방학을 보내는 스스로가 억울도 하여서, 오늘 밤에 형들에게 놀자고 연락해보자 다짐해 보는 모아이였다.


 모아이는 오늘 밤에 어떤 형에게 연락해볼까 궁리하며 변기 커버를 열다가 무언가를 보고 얼어 멈추고 말았다.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데 실제로 본 적 없는 것. 자세히 보기 싫었지만 눈은 이미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콘돔. 모아이가 중학교 성교육 시간 때 구경만 해보았던 콘돔, 그것도 다 쓴 콘돔이 변기 안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저 콘돔의 주인은 방 안에 있는 빼미일 것이다.

'저 놈이 여자 친구가 생겼으려나? 아니다 그럴 리 없어'

 모아이는 빼미가 여자 친구가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최근에 빼미와 자주 만났음에도 여자와 사귀는 낌새가 전혀 없었고 며칠 전에 학교 동기 여자들과 같이한 술자리에서 빼미가 재수 없다는 여자들의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여자를 돈 주고 불렀으련가?'

 그런 생각까지 들자, 빼미가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불쌍해졌다. 모아이는 평소에 성매매에 대해 딱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견은 없었지만 성매매를 한다는 남자들을 보면 일종의 혐오감 같은 게 들었다. 그 혐오라는 감정에는 비윤리적인 행실이란 이유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정말 조금은 질투에 의한 반감도 섞여 있었다.

'돈이 많으니 여자랑 자고 싶을 때 잘 수도 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모아이는 실소가 지어졌다. 얼마나 여자랑 자보고 싶으면 돈까지 써가며 여자를 부를까. 상기된 얼굴로 전화로 콜걸을 부르는 빼미의 모습을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저런 놈이 어떻게 나보다 먼저 여자랑 사귀겠어'


안심을 하며 방으로 돌아오니, 마침 빼미는 누군가에게 카톡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여자친구이지 않을까 의심이 잠시 들었지만 금세 지우고, 그저 놀릴 심산으로 물어보았다.

"야 여자 친구 생겼냐?"

 모아이는 장난스럽게 빼미에게 말을 걸었다. 빼미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답장을 하느라 잠시 대답을 못 하다가, 문자를 다 쓰고선

"어? 응. 여자 친구 생겼어"

 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였다. 모아이는 깜짝 놀랐다. 이내 빼미가 돈으로 여자를 산 것이 아닐까 착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빼미가 어리숙하고 음침한 구석이 있어도 그래도 순진한 구석은 있기에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아이는 질투 때문에 빼미는 여자 친구를 사귀지 못할 것이라 단정을 지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착각에 크게 부끄러웠다.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그는 빼미에게 궁금증을 내며 물어보았다.

"오~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 영지, 영지랑 사귀어"


모아이는 귀를 의심하였다.

'영지라고?'

 한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영지를 작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영지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며 부산 사투리를 귀엽게 쓰는 아이였다. 영지는 모아이에게 은근히 팔짱도 끼고 살갑게 대하였기에 그는 '혹시나 영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라며 착각하였다. 점점 그는 영지가 신경 쓰이다가 어느덧 밤마다 고백을 하는 상상을 해보는 지경까지 왔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영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만큼 순수하였다. 하지만 순수한 만큼 그것을 깨트리기 싫은 법일까, 순수한 마음이 깨져버리는 것이 싫었서 고백마저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홀로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있다가,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서로 누굴 좋아하네 마네 그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다가 모아이는 대뜸 영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였다. 그가 그런 행동을 했던 연유에는 곪아진 마음에 피를 빼내고 싶은 심정 혹은 은근히 자기도 누군가를 좋아할 만한 낭만을 가지고 있는 걸 뽐내고 싶은 심정 정도가 있었을 테다. 그렇게 힘겨운 고백을 하자 이내 남정네들은 환호와 놀라움으로 찬 함성을 내질렀다. 모아이는 그저 머쓱하게 그리고 풋내기 마냥 피식 웃어댔다. 그렇게 수줍게 그리고 어렵게 내뱉은 모아이의 고백에 빼미가 뱉었던 말은.

"저 녀석 영지랑 자고 싶은가 보오"

 빼미의 저질스러운 말에 사내놈들도 소주에 젖은 목구녕으로 껄껄껄 웃어대었다. 모아이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빼미의 저질스러운 혀에 더럽혀져서 화가 났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모아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영지 엉덩이 예쁘지!"


 그날 모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지를 희롱한 것이 마음에 영 걸리었다. 심지어 조금 눈물까지 흘렸다. 모아이는 영지를 희롱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매일 밤 영지를 생각했고 혹여나 자기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영지가 알기라도 하면 자신과 멀어질까 봐 애써 감추려 하였다. 다만 자신의 마음이 정말로 순수하다는 사실만은 그녀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 순수한 마음을 사내놈들에게 들키기 싫어서일까. 혹은 순간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빼미의 말에 덩달아 영지를 희롱해버린 것이다. 먼저 희롱하였던 빼미가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그렇게 희롱하였던 빼미가 영지랑 사귄다니, 모아이는 분하였다.

'어찌하여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빼미는 대뜸 말도 없이 잠차코 있는 모아이가 수상스러워서 낄낄 대며 농을 쳤다.

"이 녀석 울어?"

 모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더구나 빼미가 우냐고 물어보니 왜인지 더욱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빼미는 심상치 않은 모아이의 낌새에 농을 치던 입이 쏙 들어갔다. 모아이는 그 자세로 일어나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하였다.

"나 집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 다음에 보자"

 빼미는 붙잡지 않았다.



*

 모아이는 곧바로 빼미의 집에서 나와 인적 드문 산책로를 걸었다. 그 산책로는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장마라서 제법 물이 불어 있었다. 이 거리도 언젠가 영지와 단 둘이 걸어본 적이 있던 길이라 모아이는 퍽 서글퍼졌다.

'왜 걔는 되고, 나는 안되고!'

 이 거리를 영지와 무슨 말을 하며 걸었는지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상세히 기억이 났다. 자신을 향해 웃고 떠들던 영지의 얼굴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남에게 뺏기고야 말았다.

'그래, 내가 그렇게 잘 난 놈은 아니지'

 모아이의 분노는 이내 자기 비난으로 바뀌었다. 영지는 원래 남자들 대할 때 살갑게 대하는 구석이 있는 여자이기에 그런 점이 여자의 'ㅇ'만 들어도 솔깃하는 모아이 같은 사내들에게는 아주 착각하기 딱 좋은 여자였다. 모아이도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있는 남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지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착각하지 않으려 백 번, 천 번, 만 번 애썼다. 하지만 십만 번은 애써야 했을까.

 작년 겨울. 모아이는 이 해가 가시기 전에 그도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누군가와 함께 겨울을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전에 영지가 '아 크리스마스 때 같이 보낼 남자 없나~'라며 그의 앞에서 투정 부리기도 했던 것이 자꾸 잔상으로 머릿속에 남아 아른거리고 있었다.

'설마 나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일 거야... 하지만 정말로 나에게 넌지시 눈치 준 것이라면?'

 이러한 고민을 모아이는 백 번, 천 번, 만 번을 하였다. 머릿속에서 번뇌가 쌓일 때마다 담뱃불로 애써 사그려뜨렸다. 그렇게 피운 담배가 하룻밤 사이에 두 갑은 되었다. 그리고 결단을 내어 카톡을 보냈다.

[영지야 크리스마스 때 머함? 영화 보러 갈래?]

 바닥에 쌓인 담배꽁초들 개수보다 한참 모자라는 글자수였다. 그는 답장이 올까 겁이 나서 감히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답장이 어서 오길 바라기도 하면서 오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또 번뇌를 짓누르기 위해 피워 된 담배가 또 한 그릇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후, 답장이 왔다.


[착각하지 마...]


 모아이는 이 짧은 문장을 비문학 해독하듯 읽어내려 하였지만 저 짧은 문장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으려 짜면 짜낼수록 메말라지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낙담한 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고 개학을 하고 그와 영지가 마주하였을 때, 서로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하였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영지의 태도에 모아이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낭만스래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영지는 빼미란 놈이랑 사귀는 것이다.

'왜 나 말고 그놈이랑 사귀는 것이지? 내가 머리숱도 없고 어깨도 좁다고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일까?'

 세상에 그 혼자인 것 같았다. 공기는 습습했고 풀은 무거운 공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개천을 지나는 모아이의 모습은 마치 순례길을 걷는 수행자 같아 보였다.

"연애가 도대체 무어길래!"

 매미도 울지 않는 이 거리에서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읊어보았다. 하지만 모아이를 위로해줄 이는 하나도 없다.


*

 그때 어딘가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어이 어이 어이!"

 철판을 긁는 듯한 쉰 목소리였다. 무척이나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혹여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가 하여 모아이는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 숙취에 헛것을 들은 것인가'

 어제 대학 동기가 알바 월급을 받았다며 한 턱 쏘았다. 빼미도 어제 불렀지만 귀찮다며 나오질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귀찮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일로 바빴던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머리가 지끈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그 기억을 떨쳐내려는 건지 그는 머리를 홱 돌려 가려는데,

"어이 어이 어이 어이! 뒤 돌아보는 너!"

 모아이는 다시 뒤돌아보았다. 섬뜩하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면 사람 목소리를 따라 할 줄 아는 앵무새 거나 어치 소리이련가. 하지만 나무 위를 보아도 바닥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일까?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치는 앵무새처럼 주위 소리를 잘 따라 한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이 쪽을 봐봐!"

 모아이는 두리번거리다가 옆 풀 숲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질뻔하였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흙 묻은 호박 같은 모습의 대가리. 말 그대로 대가리였다.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일일까.



"나 좀 구해줘 너무 추워! 춥다고!"

 흙으로 더럽혀진 대가리가 하얀 눈깔을 희번덕 거리며 쨍쨍 댔다. 모아이는 대가리를 번쩍 들었다. 혹여나 몸이 파묻혀 있는 걸까 하였지만 몸 같은 건 없이 오롯이 대가리만 있었다. 모아이는 너무나 겁이 나 손이 벌벌 떨렸다.

"나 목말라! 물 좀 줘!"

"넵 알겠습니다...!"

 대가리의 기괴한 모습은 절로 존댓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거미줄로 칭칭 감긴 머리카락, 때가 탔다 못해 까맣게 물들어버린 피부. 그 사이에 부릅뜬 시퍼런 흰자. 하지만 무서워하는 티를 내면 대가리가 노할까 봐 모아이는 잠차고 대가리를 안고선, 물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하였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알바생은 스마트폰 보기에 바빠 대가리와 모아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만약 대가리를 안고 있는 모아이의 모습을 보았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알바생이 기절하는 모습은 보기가 싫었기에 대가리를 품 안으로 꼭 안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물을 냉큼 집어 들고 얼른 빠져나가려 하였다.

"빵 없어? 나 빵 먹고 싶어! 만두도!"

 물을 못 마셔서 그런지 대가리의 목소리는 마치 삐쩍 마른나무 긁는 소리 같았다. 어쨌든 이 대가리의 입을 닥치게 하려면 대가리의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고 여겨져, 그는 얼른 빵도 만두도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하였다. 알바생은 에어팟을 귀에 꽂고 포스기 앞에 있었다. 눈빛이 흐리멍덩한 바보 같은 놈이라 대가리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편의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대가리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구석진 곳으로 가서 대가리를 바닥에 뉘었다.

"나 빵 먹여줘!"

 모아이는 대가리에게 빵을 주욱 찢어 대가리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찌하여 이런 신세일까?'

 별안간 자신의 처지가 억울한 모아이였다. 어디서 굴러 떨어진 대가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도 슬슬 대가리가 거슬리기 시작하였다. 

"만두도 주어. 만두도!"

 모아이는 대가리의 성화에 꽁꽁 냉동이 된 만두를 그대로 주었다.

"아얏!"

 대가리는 만두를 씹지 못하고, 대가리를 대굴대굴 굴리며 만두를 뱉어냈다.

"야이 멍청이야! 만두를 해동 안 하고 먹는 놈이 어딨어? 네가 한번 먹어봐! 먹어보라고!"

 모아이는 대가리가 난리를 치는 통에, 시키는 대로 만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과연 씹지 못할 정도로 엄청 딱딱했다.

"아! 너 머리가 나빠! 아!! 아악!!! 야 빨리 데어와!"

 모아이는 또다시 이 극성맞은 대가리를 들고 편의점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이야 멍청한 알바생 때문에 들키지 않았지만 두 번째 들어갔을 때는 필히 들키고 말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차라리 자기 집에 데려가는 게 차라리 나을 듯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

"너 참 초라한 데서 사는구나"

 대가리가 모아이의 집을 보고 말한 첫 소감이었다. 모아이의 집 자취생들이 그러하듯 학교 앞에 있는 흔한 자취방이었다. 신축은 아니라 벽지나 가구 같은 것이 좀 세월감이 있지만 다른 원룸보다는 조금 넓긴 하여 그런대로 괜찮은 원룸이었다. 그래도 나름 소중한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대가리가 저리 틱틱대며 말하니 괜스레 풀이 죽은 모아이였다. 애써 그 말을 무시하고 모아이는 대가리를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향하였다.


<군만두 굽는 법>

프라이팬을 달군 뒤, 중불에 기름을 적당량 붓는다. 만두 바닥이 닿게 팬 위에 놓고 만두 바닥이 갈색 정도로 익을 만큼 바삭바삭하게 만든다. 만두 바닥이 갈색으로 변할 때 즈음 밥숟가락으로 세 스푼 정도의 찬물을 끼얹고 바로 뚜껑을 닫는다. 그러고 불을 살짝만 줄이고 3분 정도 기다린다. 그러면 만두가 전체적으로 촉촉하게 익게 된다. 뚜껑을 열고 불을 살짝 올려 습기를 머금은 바닥을 다시 바삭바삭하게 익혀준다. 그 뒤 꺼내서 먹으면 겉바속촉인 만두를 먹을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물을 얼마나 넣을지 불을 얼마큼 할지, 얼마나 뚜껑 닫고 기다릴지 모두 감이다. 여러 번 만들어보면 감이 생길 것이다. 근데 만두가 망하더라도 만두가 만두지, 별거 있겠어?



 모아이는 프라이팬에서 만두를 꺼내어 호호 불고선 대가리 입에 한 개씩 넣었다. 대가리는 후학후학 거리며 만족스럽게 만두를 먹었다. 배가 부른 듯 꺼억 트림을 하였다. 트림에서는 만두의 부추 냄새와 함께 비료 썩은 냄새가 났다.

"야 나 좀 씻겨주라"

 점점 대가리의 요구가 점입가경이었다.

'요 녀석, 얼마나 짜증스러운고'

 그래도 모아이는 고분고분 따뜻한 물을 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대가리의 응석을 받아줄 수 없었기에 그의 입장에선 참 심란하였다. 그저 언젠간 이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 하나로 자꾸만 대가리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그는 세면대에 대가리를 넣고 코와 입이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 안에 넣었다. 한쪽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뒤통수를 잡고 머리부터 조금씩 씻었다. 머리에선 흙과 낙엽 가지들, 벌레 시체, 거미줄이 씻겨져 나왔다. 어지간히 더러웠던지라 한 번 씻어서는 어림도 없었다. 한 번, 두 번, 총 세 번을 씻기니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릿결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씨커먼 흙먼지 아래에는 새하얀, 하얗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피부가 나타났다. 입술은 립을 바르지도 않았는데도 연핑크색이 돌았다.

 그것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둥근 이마. 큰 눈. 오뚝한 코.

 그것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둥근 이마. 깊은 눈. 조그마한 코.

 그것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작은 머리. 반듯한 귀. 빽빽하고 윤기가 있는 생머리.

 그것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예쁜.


 얼굴 부위 하나하나 씻겨 나갈수록 대가리의 얼굴은 꽃이 피는 듯하였다. 모아이도 그런 모습에 매료되어 대가리를 자꾸만 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가리의 눈은 얼마나 큰지 홍채의 굴곡들이 맨눈으로도 보였다. 그것은 마치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과도 같았다. 옅은 갈색의 홍채 안에 까만 눈동자로 모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푸른 맑은 호수에 박힌 검은 돌 하나인 것 같았다. 자꾸만 그 돌을 쳐다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었다.



 모아이는 자신이 손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 끝에는 환희와 심지어 공포까지 섞여있었다. 대가리를 수건으로 닦고 책상 위에 반듯이 세워 머리를 말렸다. 깨끗하게 씻겨진 대가리는 하나의 완벽한 조각 같았다. 

"고마워! 덕분에 죽다 살아났어!"

 대가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모아이의 각막 속에 오래오래 남았다. 목도 축이니, 목소리도 명량한 여자 목소리로 돌아왔다.

"네... 근데 몸은 어찌하고 머리만 남았나요?"

"몰라! 물에 떠내려 갔지 뭐야! 아유 짜증 나!"

 이번에 장마로 개천이 불었던 것이 떠올랐다. 올해는 정말 비가 많이 내린 해였다.

"하지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지!"

 대가리는 모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깊고 깊은 눈은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자꾸 보고 있으면 그 눈으로 떨어질까 봐 아찔해질 정도였다.

"키스를 해주면 내 몸을 다시 되찾게 돼! 키스해 줘!"

 모아이는 한 번도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기분은 무슨 기분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너 키스 안 해봤니?"

 모아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쑥이구나! 쑥! 멍청이!"

대가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날 보고 웃다니!'

 모아이는 대가리의 비웃음마저 듣기 좋았다.

"내가 가르쳐줄게! 이리 와봐!"

 당찬 대가리의 말에 모아이는 얼어붙었다. 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숨은 참아야 하는지 쉬어야 하는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키스를 하다니, 이렇게 예쁜 여자에게!'

 대가리는 뾰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숨죽이며 대가리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서서히 가져다 댔다. 영겁의 찰나를 지나, 이내 입술이 찌릿하더니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대가리의 입술은 그의 입술보다 살짝 차가웠다. 덕분에 부드러운 것이 더 잘 느껴졌다. 세상 어느 것보다 부드러웠다.


*

 그날 이후로 모아이와 대가리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한 사흘 정도 지나니 대가리의 목 쪽에서 콩나물 뿌리 같은 것이 찔끔 튀어나왔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니 뿌리 같은 것이 무럭무럭 자라서 네 줄기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니 그것들 각각은 두 팔, 두 다리 모양으로 뻗어 나갔다. 뿌리가 점점 자랄수록 점점 더 많은 양분이 필요한지, 대가리의 식욕은 점점 늘어만 갔다. 대가리의 식욕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아이는 복학하지 않고 일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아이는 불만이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쁜 대가리를 매일 볼 수 있었기에 대가리를 위하여 일을 한다는 것에 어떠한 억울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모아이의 노력 덕분에 대가리는 쑥쑥 자라서 1년쯤 지났을 때 키가 170cm 정도까지 자랐다. 하지만 키는 컸지만 아직 힘이 없어서 일어서지는 못하고 앉아서 기어 다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모아이는 대가리와 앉아서 눈높이를 맞춰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해 배가 무척 고팠던 모아이는 빵집 앞에 서서 빵을 살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먹을 밥 값마저도 아낄 생각을 하는 모아이였다. 그러다 밖에도 못 나가고 집에서 무료하게 있을 대가리가 생각나 맛있는 케이크라도 사가리라 다짐하고 빵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야 모아이! 오래간 만이다!"

 누가 자기 이름을 불렀는가 하여 돌아보니 빼미였다. 모아이는 눈앞에 있는 사내가 빼미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왜냐면, 1년 전과 다르게 빼미는 1년 전 음침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제법 어른의 뽐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아 그래 오랜만이야"

 모아이는 빼미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모아이는 빼미의 집을 박차고 나온 뒤로 그는 빼미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사실 빼미가 그에게 연락을 몇 번 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배신한 빼미가 밉기도 하고 대가리와 동거를 하며 바빠진 터라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빼미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영지였다. 

"야 뭐 하고 지냈어!"

 영지는 경쾌하게 모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아이는 영지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왜냐면 그녀는 1년 동안 술을 많이 마셨는지 살이 많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굴 곳곳에 술로 인한 열꽃인지, 뾰루지도 많이 보였다. 자신이 과거에 좋아했었던 여자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에 모아이는 웃음이 픽 났다. 동시에 그의 대가리가 훨씬 예쁘다는 생각이 들자 괜스레 우쭐거려졌다.

"너 어디 몸이 편찮구나 안색이 정말 나쁘다"

 영지가 걱정하던 투로 모아이에게 물었다. 모아이는 영지의 얼굴에 피어난 뾰루지와 기름기를 보며 남 말할 쳐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야 너 힘들면 연락해. 술이나 한 잔 하자"

 빼미가 사내다운 티를 내며 말하였다. 모아이는 여자 친구 앞이라고 괜히 남자 다운 척하는 빼미가 여간 보기 싫었다. 

"그래 그래 다음에 연락하자"

라고 서둘러 대답하고 케이크도 사지 않은 채, 빵집을 뛰쳐나왔다. 


*

"어서 와!" 

 집으로 돌아가니 그의 대가리가 그를 서서 반겨 주었다. 이때까지 서 있을 힘이 없어서 누워있거나 앉은 채로 모아이를 반겨주는 대가리였다. 허나, 오늘 처음으로 대가리는 두 발로 우뚝 서서 그를 반겨 주었다. 장장 1년이란 세월이 지나 대가리가 드디어 온전한 대가리가 되었다. 감격스러운 이 모습에 그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감상만 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대가리가 우뚝 서있는 자세는 무척 아름다웠다. 발 다리는 옥수수 갈대 같이 주욱 뻗어 있었다. 긴 생머리는 비단처럼 허리까지 찰랑거렸다. 잘록한 허리에 튀어나온 골반은 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곡선이었다. 

"나 이제 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어!"

 대가리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였다. 대가리는 조그마한 입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모아이는 한참을 대가리를 바라보았다.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두 다리로 똑바로 서있는 모습을 보니 또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 느껴져서 심지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향기가 나는듯하였다. 허나 한편으로는 모아이는 걱정이 되었다.

'나를 두고 떠나면 어떡하지?'


*

모아이는 저녁밥을 차려서 대가리와 함께 먹었다. 두부튀김에 돼지고기 생강 조림으로 먹었다.


<유사(類似) 쇼가야키> (2인분)

 1. 끓는 물에 냉동 대패 삼겹살(400g 정도)을 넣고 1분 정도 데친다.

2. 양념장을 준비한다. (간장 3Ts, 맛술 2Ts, 고춧가루 1Ts, 생강 칼로 다진 것 1Ts, 마늘 다진 것 1Ts, 청주 2Ts, 꿀(메이플 시럽 넣었음) 1Ts)

-생강은 주로 강판으로 가는데, 나는 칼로 다졌다. 칼로 다지면 생강이 아삭 거리는 식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3. 센 불에 팬을 예열시키고 데친 고기를 넣는다.

4. 고기를 넣고 바로 양념장을 넣는다.

5. 센 불에 휘저으면서 졸인다.

6. 요리를 마치기 1분 전 참기름 1/2Ts와 후추 살짝을 넣는다.

7. 부추를 동강동강 썬 것을 접시에 깔고 그 위에 고기를 얹힌다

8. 끝



<유사(類似) 아게다시도후>

1. 두부(1모)에 키친타월이나 수건을 감싸고 그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 물기를 빼준다.

2. 비닐봉지 안에 전분(나는 칡 전분을 넣긴 했는데 좀 찐득한 식감이 있어서 감자전분이 더 좋을 듯하다)을 넣고 두부를 동강동강 썬 것을 넣고 흔들어 두부에 전분을 묻힌다.

3. 양념장을 준비한다.(쯔유 1Ts, 진간장 1Ts, 맛술 2Ts, 청주 2Ts, 생강 (새끼손가락 반 정도 되는 크기를 어슷 썰어서 준비))

4. 양념장을 1분에서 2분 정도 끓인다.

5. 프라이팬에 기름을 자작하게 두르고 전분을 묻힌 두부를 골고루 튀기듯이 굽는다.(사실 기름 가득 넣어 튀기면 좋지만 기름이 아깝다)

6. 두부가 노릇하게 익으면 꺼내고 파 흰 부분을 먹을 만큼 넣어 노릇하게 튀긴다.

7. 접시 위에 익은 두부와 파을 두고 그 위에 양념장을 붙는다. 그리고 가쓰오부시를 먹고 싶은 만큼 뿌린다.(나는 대략 10g 정도 넣음)

8. 끝


"야 나 신발도 사주어"

 밥 먹다 말고 대뜸 대가리가 신발을 사달라고 졸랐다. 대가리는 여태까지 가방이든 옷이든 뭐든 다 사달라고 하였지만, 신발을 사달라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옷이나 가방 따위야 사는데 주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신발은 달랐다. 신발을 사면 자꾸만 도망갈 것 같아 겁이 났다. 

'밖으로 쏘다니기 시작하면, 이제 내 곁에 남아있지 않겠지?' 

 모아이는 대가리를 키운 것은 부모의 심정 같은 -그것과 비견되는- 숭고한 정신이 깃든 것이라 자부하였지만은 숭고한 정신 바로 뒷면에는 더러운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 욕망은 대가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존재하였고 여태까지 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서 참고 견뎠다. 그 욕망은 독수리가 생살을 뜯어먹는 것과 견줄만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여태 참아온 것만으로도 성인(聖人)이라 할만하였다.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선(善)으로써 대가리를 대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선(善)으로 대하려 애쓸수록 모아이는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죄책감을 참으면 참을수록 대가를 바라는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이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아이도 애써 무시해 왔다. 이 대가가 무엇인지 스스로 밝혀낼 수 없었다. 왜냐면 그 순간 그의 선(善)이 더럽혀 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거의 한계에 다 달았다.  그리고 그도 아름아름 인정을 하는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서러워서 말문이 막혔고 참담하기도 하여서 밥 먹다 말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야 울어?"

명량한 대가리의 음성이 들렸다. 명량한 대가리의 음성이 그의 머리를 읭읭 울렸다.

'아 내가 했던 모든 수고들이 헛것이련가?'

 그는 대가리를 보내주는 것도 사랑인 건가 고민하였다. 그래 대가리를 사랑하기에 대가리를 놓아주자. 그래 이것 또한 사랑의 한 형태이지 않겠느냐. 그리고 이내 그는 이러한 생각의 연계에서 데자뷔를 느꼈다. 그렇다, 그가 영지를 놓아줄 때도 이러한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어째서 그는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나에게 사랑이란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인 것일까'


 그때 대가리가 우는 모아이의 등을 뒤에서 달래주는 모양으로 안아주더니, 같이 울어주었다. 모아이의 흐느낌에 따른 등의 움직임에 따라 대가리도 그 흐느낌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동기화(化)로 인해 대가리의 흐느낌이 그의 등을 타고 느껴졌다. 모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공감하는 대가리의 마음이 참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설레었다. 그것은 1년 전 키스 이후의 첫 스킨십이었기 때문이다. 울음으로 습습해진 등 거죽에 따뜻한 대가리의 숨결과 자기를 끌어안은 팔의 무게감을 느끼려 애썼다. 그리고. 대가리의 우는 모습을 어떨까 심히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모아이는 우는 모양새로 서서히 고개를 들어 대가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우는 모습은 어떨까'

 대가리의 얼굴에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눈이든 코든 심지어 앞머리에도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엉망징창으로 얼굴을 젖어있는 것을 보니 문득 키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계속 울까 아니면 키스를 할까. 키스를 해도 괜찮을까. 아니면 계속 우는 척을 할까. 고민하며 울기만 하는 모아이였다.


*

 그리고 그날 이후 대가리는 드디어 밖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아직 연약하여 불안하게 걷기는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된 것이 기쁜 것인지 자꾸만 쏘다녔다. 그래서 대가리가 일을 마치고 집에 와도 그녀가 없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이제 모아이는 걱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저 하루하루 대가리를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만으로 기쁨을 누리려 하였다. 대가리가 떠날지 떠나지 않을지 걱정하는 것은 무용(用)하였다. 

 


 저 고원의 나무처럼. 모두 새싹에서 시작되었고 언젠가 모두 죽어 썩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무와 함께 나도, 대가리도,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언젠가 끝날 것이다. 그렇기에 끝낼 것은 걱정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저 살아 있을 때 이 순간을 걱정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대가리는 공원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신기한 듯 거닐었다. 아름다운 대가리의 자태가 지나가는 남정네들은 물론, 여자들도 한 번씩 대가리를 쳐다보았고 심지어 풀벌레, 나무들 조차 반기는 듯하였다. 이러한 순간이 그에게 찾아오리라 누가 알았을까. 1년 전 즈음, 대가리와 기묘한 만남 이후로 그는 스스로 크게 성장하였다 자부하였다. 대가리를 책임지고 지금까지 기른 자부심. 대가 없는 사랑으로써 이러한 업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래 오늘을 즐기자'

주위 남자들이 모두 자기를 시기 어린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다.  손만 안 잡고 있어서 그렇지 연인 같아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손은 안 잡고 있으니 오래된 커플로도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가리와 만나기 전에는 모아이에게도 많은 욕망들이 있었다. 남들보다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은 욕망. 그리고 사소하게 돈이 많고 싶은 욕망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 욕망, 기타를 잘 치고 싶은 욕망 등등등 하지만 이제 욕망은 아주 단순하게 변하였다. 대가리와 함께 손을 잡는 욕망. 대가리와 함께 같은 지붕에서 오래오래 사는 욕망.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저 발랄하게 걸어 다니는 대가리의 손 끝을 한 번이라도 스쳐보고만 싶었다. 그런 욕망은 순수하게 느껴졌고 순수한 욕망을 느끼는 자신에게 벅찬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습습한 여름이 왔고 매미는 울기 시작했다.

따뜻한 햇살. 아름다운 대가리. 뜨거운 여름이었다.


*

 그리고 장마가 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또 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이 어둑어둑하였다. 오늘은 모아이가 도로 공사에 교통 통제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에 비가 내리면 오늘은 일을 쉬게 된다.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침대에 곤히 자고 있는 대가리를 보니 오늘 하루 정도는 쉬고 싶어졌다. 빗속에서 같이 우산을 쓰며 산책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별 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연락이 온 것은 결국 현장에 도착하기 몇 분 전이었다.

'빨리빨리 연락해주지 참나'

 홧김에 괜히 비에 젖은 땅에 침 한번 찍 내뱉었다.


 모아이는 다시 빗 길을 뚫고 집으로 향하였다.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는 것에 만족하자고 긍정스레 생각하였다. 습기가 가득 찬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집에 들어갔을 때의 대가리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되었다. 그런 여러 가지 미래를 예측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산 아래에서 슬그머니 대가리에게 손을 잡는 상상을 할 때 즈음에 그는 버스에서 내렸다. 아까보다 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덕에 옆에 냇가에선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귓속을 왱왱왱 울려댔다.

'여기서 대가리와 처음 만났지'

그렇다 작년 이맘때 즈음에 대가리와 여기 즈음에서 처음 마주하였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집에 가서 대가리와 빗속에서 데이트나 할까'

 대가리는 걷는 것을 좋아하니 같이 산책 나가자고 하면은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같이 우산을 쓰고 나가면 분명 딱 붙어서 걸을 수 있겠지. 그런 상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맞은편 길에서 빨간 우산을 쓴 커플이 걸어오고 있었다. 좁은 길이었기에 필히 마주칠 터였다. 비가 워낙 세차게 내리는 터라 잘 보이지도 않았고 오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모아이도 거의 마주하기 직전까지 빨간 우산을 쓴 커플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렇게 가까이 왔을 때 모아이는 빨간 우산의 커플들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빨간 우산 아래에는 빼미와 대가리가 꼭 붙어 있었다.


 모아이는 그들을 보고 놀라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빼미와 대가리도 자기들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가 모아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모아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그저 찬찬히 빼미와 대가리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가리는 짜증 난다는 듯이 모아이를 쳐다보고 있었고 빼미는 눈치나 실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아이는 우산 손잡이에 대가리의 손과 빼미의 손이 포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모아이는 화가 나서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날 지경이었다. 

"오래간 만이다!"

빼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내며 인사를 하였다. 하지만 모아이는 그런 태도가 더 화가 났다.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어찌하여 빼미와 대가리가 서로 알게 되었는지 상세히 말해보자면 이렇다. 빼미와 대가리가 빵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날, 빼미는 모아이의 행동이 이상하여서 그에게 다시 연락을 하였으나 받지를 않았고(모아이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연락조차 되지 않으니 직접 모아이의 집으로 간 것이다. 문을 똑똑 두드리니 나온 것은 역시나 대가리. 빼미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 순식간에 반하였다. 대가리도 심심하던 차에 묘령의 사내가 집에 방문하였으니 심심풀이 땅콩으로 제격이었다. 그 뒤로 모아이가 일하러 나간 사이 빼미는 자주 대가리의 집에 찾아왔고, 대가리가 걸어 다니기 시작하자 이제는 대가리가 빼미네 집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아 당연히 빼미는 대가리와 만나며 영지는 차 버렸다.


 모아이는 화가 났다. 대가리는 어떻게 이런 놈이랑 놀아나는 걸까? 어째서 빼미는 영지도 뺏어가고 대가리도 뺏어가는 것일까?

"야 너 화났어?"

 빼미는 천연스레 눈치나 보며 말하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 여자를 가로채다니!'

모아이는 뻔뻔한 그가 짜증 났다. 

"쟨 내 거야!"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한 번 더 내질렀다.

"쟨 내 거라고!"

 빗소리에 자기 소리가 묻힐까 봐 두 번이나 외쳤다. 빼미는 불쾌한 얼굴로 모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가리를 쳐다보니 대가리도 불쾌한 얼굴로 모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아이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왜 이 두 사람은 자신을 불쾌하게 쳐다보는 것일까.

 "미친놈 아냐. 꺼져"

 빼미는 작은 키로 모아이를 올려다보며 지껄였다. 모아이는 저 비죽거리는 입을 어떻게든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의 것을 다 뺏어갔는데도 뻔뻔한 빼미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하였다. 모아이는 빨간 우산을 뺏어 들었다. 그를 우습게 보는 두 년 놈들을 자기와 같이 비에 젖게 해주고 싶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빼미는 우산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지만 자신보다 덩치도 더 크고, 지난 1년 동안 숱한 일로 잔근육이 붙은 모아이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우산을 모아이에게 뺏겨 버렸다. 그렇게 뺏어든 우산으로 모아이는 빼미를 찌르고 때리기 시작하였다. 빼미는 맞으면서 예전에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 코에 꼬챙이를 넣어 뇌를 꺼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필사적으로 코 밑을 가렸다.



 우산으로 콕콕 빼미를 찌르다가, 발길질도 같이 버무려 빼미의 엉덩이를 패주니 빼미는 식식거리다가 이내 눈치를 보고 뒤로 내빼었다.

"뭐야! 왜 이렇게 참견이야? 네가 내 남친이라도 돼?"

 대가리가 소리 질렀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마저 예뻤다. 그런 모습마저 예쁘다고 생각하는 모아이는 더욱 억울해졌다.

"넌... 내 거잖아!"

 비참하였다. 대가리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미워할 수조차 없는 자신이 비참하였다. 


 대가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듯한 말로 말하였다.

"착각하지 마"

 그녀는 비웃었다. 아름다운 칼로 그의 심장을 긋는 듯하였다. 그러고선 그녀는 뒤돌아 빼미가 내뺐던 길로 향하였다. 모아이는 냉큼 그녀를 붙잡았다.

"가지 마"

"놔! 놓아!"

 그녀의 팔은 가녀렸다. 그것이 그녀와의 세 번째 스킨십이었다. 생각보다 가녀린 손목에 그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째서 자신은 아무것도 못하는 것일까 왜 그녀의 몸에 손 한번 꼼짝 못 대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은 이런 식으로라도 팔 한번 붙잡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 왜 이 순간조차 영원하길 바라는 것일까. 비참하였다.

"놔! 놓으라고!!!"

 세찬 개울의 소리를 뚫고 그녀의 세찬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억울하였다.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왔을까. 그는 평생 무언가 바라면 안 되는 삶인 것인가?

'따뜻하게만 손만 잡아주면 되는데!'

 그렇다 그는 따뜻한 손길 한 번이면 족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손톱이 부러질 듯한 꼬집기와 생치기였다. 참을 수 없었다.

'왜 걔는 되고, 나는 안되고!'

 모아이는 기어코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고야 말았다. 세게는 아니지만 모아이는 그녀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냥 그녀를 어떻게든 멈추게 하고 싶었다. 아프게 하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때리는 그 순간에도 그의 심장은 너무나 아팠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때리는 순간, 나무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대가리의 대가리가 목 위에서 핑글핑글 돌아갔다. 마치 지구본이 돌아가듯이 돌아갔다. 대가리는 키예에엑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대가리의 대가리가 빙글 돌면서 비명을 돌려 대는 탓에 마치 그 소리가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비슷하였다. 그 기괴한 모습에 모아이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대가리의 대가리는 그렇게 핑글핑글 돌다가 다시 한번 나무 장작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똑하고 떼어져 개천으로 떨어졌다. 대가리의 손이 대가리의 대가리를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렸지만 놓치고 말았다. 대가리의 대가리는 이미 불을 대로 불은 개천에 빠졌고, 후룸라이드 타듯 슝~ 하류로 떠내려 가버렸다. 대가리의 몸은 허우적거리며 대가리의 대가리를 붙잡으려 하다가, 곧 난간 밑으로 떨어져서 대가리의 대가리처럼 후룸라이드 타듯 슝~ 하류로 떠내려 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아이는 꼼짝도 못 하였다. 그렇게 대가리와의 기괴한 동침은 갑작스레 끝나게 됐다.


*

 모아이는 대가리와 있었던 일은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가리와의 일련의 사건 이후, 도망치듯 간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

'야 너 여자 친구 있냐?'

라고 물어봐도

'아뇨. 아다입니다'

라고 그는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하였다. 복학했을 때는 이미 영지든 빼미든 졸업을 하여(빼미는 면제였다) 학교에 있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였고, 못할 것 같은 연애를 3번을 하였다. 그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의외로 결혼은 3번째로 사귀었던 영지와 하게 되었다. 졸업 후 동창회에서 우연히 영지를 보게 되었고 간만에 만나니 어색한 것도 없이 편하게 술 한잔 걸치게 되다가 그날 밤 모텔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고,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모아이가 영지와 자게 된 것은 집착 같은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영지는 그동안 몇 번의 성형을 통해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적어도 모아이는 학생 시절의 영지와 졸업하고 나서의 영지'를 따로 기억을 하였다. 그리고 반년을 사귀다가 덜컥 애가 생기는 바람에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


 삶은 단순하게 빠르게 흘러갔다. 젊은 날 빼미네 집에서 빈둥빈둥 놀며 크면 어떤 어른이 될까 걱정을 하며 살았는데, 군대 다녀오고 취직을 하고 남들 하듯 결혼을 하고 남들 하듯 애도 낳고 살고 있었다.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모아이는 이 삶이 불만스럽지 않았다. 적어도 20살 적에 여자 손 한번 못 잡아 봐서 전전긍긍하는 삶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예전에는 여자 손 한번 잡는 것이 소원이었다면 지금은 아들 하나 건강히 잘 자라는 것 밖에 없다. 근데, 아들이 영지가 성형하기 전 모습을 많이 닮아서, 모아이네 가족은 서로 다 다르게 생겼다. 무튼, 모아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쉼 없이 일을 하였고 영지도 같이 일을 하느라 아들은 장모님이 바 주기 일수였다. 그나마 오늘은 모아이의 일이 일찍 끝나서 아들과 함께 아내가 일하는 사무실 빌딩 1층 카페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이 1층 카페에서는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내들이 많이 있다. 다들 누군가를 기다리겠지. 다들 이런저런 모습으로 비교적 비슷하게 늙어가고 있다. 그들 중에는 모아이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많다. 아이들은 그들의 엄마 아빠에게 때를 쓰곤 하고, 엄마 아빠들은 피곤하지만 자식들의 응석을 모두 들어준다. 


 아들에게는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여주며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니, 때 부리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영지'가 오기 전에는 저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야 할 텐데'

 영지'는 아이스크림을 아들에게 주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영지'는 아들이 영양 불균형이 일어날까 봐 걱정을 하지만 적어도 모아이는 자랄 때 아무거나 먹으면서 자랐는데도 아무 탈 없이 잘 자랐다. 그런 문제로 자주 다투었지만 결국에는 아들의 건강에 더 신경이 곤두선 영지'의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숱한 친구들이 말을 한다.

'남자는 여자 말 잘 들으면 반이라도 가!'

 그래 이 말을 성경 말씀처럼 믿으면서 영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그냥 참고 산다. 순간 그는 주차를 어디다 하였는지 헷갈렸다.

'지하 1층에다 했던가? 지하 2층에다 했던가?'

 전에 영지'가 주차 구역을 까먹은 모아이를 꾸짖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까먹은 모아이를 꾸짖겠지

'그래 남자는 여자 말 잘 들으면 반이라도 가겠지'

 그래 납득을 하였다. 납들을 하고 참는 것이 나쁘지 않다. 이렇게 모아이가 참고 배려하다 보면은 언젠가 영지'도 알아주겠지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누군가 싶어 뒤돌아보니 한 여자가 있었다.

"오빠 오래간만이야!"

 아 어디서 봤더라. 왠지 낯이 익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아주 예뻤다. 이렇게 예쁜 여자를 본 것은 그 전에도 그 뒤로도 없었다. 대가리였다. 

'대가리라고?'

대가리는 지난 16년 동안 늙지도 않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좀 더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랄까? 하지만 끽해야 20대 후반 같은 외모였다. 눈빛에 생기가 있었고 눈빛 끝에는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왜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거지?'

 잊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모아이의 머릿속 먼지 묻은 앨범 속에 대가리와의 기억이 모셔져 있었다. 대가리의 눈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 저 눈에 모아이가 애걸복걸했었다.

 지중해 바다 같은 눈. 

 하지만 영악한 눈.

 나를 이용해 먹은 눈.

 모아이는 대가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가리의 동공은 예나 지금이나 깊은 동굴처럼 깊었다. 저 동굴 깊숙하게는 무슨 꿍꿍이가 있으리라 여겨져 그 동공을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뒤돌아보니 푸른 지중해 바다가 보였다.



그제야 싱긋 웃고 있는 대가리의 빙그레 웃는 입술이 보였다. 입술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황금 비율의 곡선을 따라 입술은 웃고 있었다.


모아이의 가슴은 떨렸다.


가슴은 두근두근

눈깔은 때굴때굴

대가리는 대굴대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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