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과거에 대한 예의
세상을 살다 보면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오롯이 나에게 귀속되어 있던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세상에 밝히게 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가령 학창 시절에는 시험이라는 장치를 통해 나의 공부한 과정과 시간의 가치를 세상에 공개하게 됩니다. 특히 시험 전날, 시험 당일 아침, 시험 직전 쉬는 시간, 마지막으로 시험을 보는 시간으로 갈수록 내가 길게 펼쳐서 쌓아온 가치가 상당히 압축됩니다. 1시간의 시험을 위해 100시간을 공부했다면, 100시간 동안 쌓은 가치를 세상에 공개하고 전달하는 1시간은 공부했던 시간의 100배 농축되어 있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나에서 다른 사람이나 세상에 가치가 전달될 때는 마치 데이터 파일이 압축되듯이 가치가 수십~수백 배 농축되어 전달됩니다. 따라서 가치를 만드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특히 가치가 농축되어 농도가 짙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전에 가치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간의 합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시험이 너무 쉽다고 전체 60분의 시간 중 10분 만에 모든 문제를 풀고 잠을 자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저 또한 그런 적이 있습니다. 아는 것을 온전히 시험지에 표현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번 더 봤더라면 실수를 안 했을 텐데라는 감정을 한번 더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으시다면, 가치가 농축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을 만납니다. 세상의 빈틈을 채우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다가 대략적인 방향성을 찾아 프로젝트를 발의하는 순간. 발의한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상사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순간. 프로젝트 결과와 의미를 정리하여 보고하는 순간. 가치를 만드는 시간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성향상 혹은 직종의 특성상 세상에 없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 쉬운 연구직 등에 종사한다면 가치를 전달하는 순간에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가치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순간은 어쩌면 가장 지루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이미 많은 시간을 쏟았고 그 쏟은 시간하나하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물릴 대로 물릴 음식을 다시 한번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는 것들 단지 전달하는데 힘을 쏟는 것은 가치 창출에 쏟을 시간을 뺏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나에게는 가장 지루한 순간이지만 농축한 가치를 전달받는 이에게는 첫 경험의 순간이자 어쩌면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그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지의 여부가 내가 만들어낸 가치가 나에게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는지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가치를 전달받는 사람에게 메일을 하나 쓰더라도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신경 써서 씁니다. 보고를 하더라도 단순히 내가 한 것을 준비 없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을 준비하고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합니다. 신기하게도 학교를 다닐 때는 프로젝트의 결과 발표를 위해 밤새 연습했던 사람도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결과를 설명할 때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가치가 농축된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노력하는 사람은 프로젝트를 준비한 100시간의 가치를 단 5분 10분 만에 전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습합니다. 아니 가치를 전달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비로소 마음을 가지고 의도를 가지고 노력하고 연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치를 잘 전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특히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가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기획 결과물처럼 무형의 개념적인 내용이라면, 고객을 만나는 진실의 순간 (MOT, moment of truth)만이 내가 만들어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치가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밀도와 무게를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며 한정된 진실의 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획영역에서 다른 직무보다 PPT라는 수단에 신경을 쓰는 것도, 생각을 손에 잡히는 공간으로 옮겨 진실의 순간에 상대방에게 조금 더 선명하고 가시성 있게 생각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내 정치라고 표현되는 관계를 맺는 행위에 신경을 쓰는 것도, 어쩌면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을 더 많이 만들고 싶은 마음 그 순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마음이 착각의 순간 (moment of illusion), 기만의 순간(moment of deception)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요.
학교와 회사의 이야기를 대부분 했지만 브런치에서 글을 발행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맞춤법을 검사하고 퇴고를 하는 순간이 작가님들이 마주하는 진실의 순간일 것입니다. 저도 정말 쉽지 않지만 발행을 누르기 전에 다시 한번 내가 만들어낸 가치가 농축되어 전달되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그 순간이 그 글을 쓰기 위해 글감을 정하고 글을 써 내려간 모든 시간이 농축된 시간일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