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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24. 2023

출근해서 팬티를 갈아입었다

 경운기가 아래로 굴렀다고 합니다. 사람이 밑에 있고, 신고자 흥분해서 정확한 상황 파악 어렵습니다.


 지령 방송도 이 정도면 거의 암호문이다. 아래로 굴렀다는 게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사람이 그냥 밑에 있는 건지 경운기에 깔린 건지, 산 건지 죽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현장에 나가야 비로소 상황 파악이 된다.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하천 위를 지나는 작은 다리를 경운기로 건너다가 사고가 났다. 경운기는 아버지가 몰았고, 딸은 경운기 몸체에 붙은 디딤판에 발을 올리고 서서 갔다. 방향을 틀다가 바퀴가 비탈에 미끌렸고, 두 사람을 태운 경운기는 그대로 하천에 처박혔다.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는데 딸이 문제였다. 구르면서 운 나쁘게 경운기 몸체와 바퀴 사이에 골반이 끼었다. 탈것의 무게에 한 번 눌렸는지 아귀가 안 맞는 블록을 갖다가 억지로 끼워 맞춘 것처럼 빠지지 않았다. 몸이 끼인 채 널찍한 경운기 바퀴 위에 엎드린 자세였다. 힘 없이 늘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았을 땐 죽었는가 싶었다.

 함께 출동한 진압대원들이 바퀴를 해체하는 동안 엎드려 있는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왼 눈썹 위쪽의 작은 열상 외엔 개방된 상처가 없어서 출혈은 많지 않았고 혈압과 심박, 호흡도 정상 범위였다. 염려가 되는 건 골반이 끼인 상태가 지속되면 신경이 손상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다리를 못 쓰게 될까 봐 눌린 부위 아래쪽을 수시로 체크했다. 여자의 아버지는 떼어내면 달라붙고, 떼어내면 어느새 또 달라붙어서 웅얼거렸다.

 왜 떨어졌지. 왜 떨어졌지.

 유압 전개기로 바퀴와 몸체를 벌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펌프차 공구함의 스패너를 가져다 바퀴의 너트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십여 분 만에 바퀴가 떨어졌다. 환자를 긴 척추 고정판으로 옮기고 스파이더 벨트로 고정했다. 출동한 모든 대원들이 비탈에 죽 늘어서서 환자를 전달, 전달하는 방식으로 구급차까지 옮겼다.


 처음엔 감각이상을 호소하던 여자의 오른쪽 다리는 병원 가는 동안 차차 회복이 되었다. 대신 복부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푸르스름했다. 내장파열이나 내부출혈 가능성도 있었다. 여자는 구급차 조명이 눈부신지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아버지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병원 앞에는 다른 곳에서 일하다 온 환자의 남편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전후사정을 전해 들었는지 환자 아버지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치미는 걸 꾹 눌러 참으며 한 마디 했다. 괜찮아? 그러자 여자는 여전히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안심하라는 듯 다른 쪽 팔을 휘 휘 흔들었다. 남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센터로 귀소 해서 재정비를 하는데 그제야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었다. 물과 진흙이 엉겨 붙은 바지는 납땜을 해서 봉제선을 이어 붙인 마냥 무거웠고, 신발도 다 젖어서 발목 위로 흙탕물을 찍찍 뱉었다. 뜨거운 데서 진땀을 빼느라 웃옷은 물론이요 팬티까지 흠뻑 젖었다. 옷 갈아입는다고 출동을 미룰 수는 없기 때문에 최대한 서둘러 정리를 했다.

 젖은 신발은 해가 잘 드는 소방서 출입구 계단에 기대어 놓고, 바지와 웃옷과 팬티와 양말은 구급대 전용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맘 같아선 샤워라도 하고 싶은데 불안해서 관두기로 했다. 언젠가 온몸에 거품이 잔뜩인 채로 급한 출동이 걸리는 바람에 애를 먹은 일이 있었다. 그 뒤로 소방서에서 샤워는 자제한다.


 출근할 때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대기하는 동안 보려고 꽂아 둔 기욤 뮈소의 소설 '사랑하기 때문에'가 한 달이 넘게 그 자리에 있었고, 고이 접은 양말과 팬티가 그걸 아래에서 쿠션처럼 받치고 있었다. 새 속옷을 꺼내 입자 뽀송한 감각 덕에 갑자기 나른해졌다. 책도 함께 꺼내려다가 말았다. 무거워서 팔만 아프니 다음 근무부터는 집에 두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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