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Jun 11. 2023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

 복도는 교실에서 도망 나온 아이들로 아수라장이었다. 불이었다. 타 죽을 수 있는 진짜 불. 큰 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세 곳은 잿빛 수의를 입은 연기가 모두 가로막았다. 힘이 좋은 친구들은 건물 밖 창문 프레임과 벽을 짚어가며 옥상까지 기어오르고, 가벼운 친구들은 외부로 늘어진 인터넷 선을 잡고 타잔처럼 내려갔다. 애매한 친구들은 그냥 뛰었다. 2층 높이라 죽진 않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숨을 쉬면서 안전한 곳을 찾았다. 컴퓨터실 입구는 방화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곳으로 달려가니 평소 아이들에게 엄하기로 유명한 선생님, 불 붙인 부탄가스를 장대에 매달아 거미줄을 제거해서 파이어뱃(firebat)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그 선생님이 막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다. 분명 달려오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파이어뱃은 주저 없이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연기를 많이 마셔서 어질어질했다.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복도 중간에 마련된 수돗가에 자리를 잡고 퍼질러 앉았다.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취이이익, 취이이익


 아득한 곳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취이이익, 취이이익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다스베이더처럼 시커먼 헬맷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무거워 보이는 옷을 입고 그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공기통을 짊어진 채 느릿느릿 걸어왔다.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손짓하며 무어라 말을 했는데 잘 들리진 않았다. 살고 싶으면 따라와. 아마 그런 거 아니었을까. 남자의 숨소리를 쫓아갔다. 저런 일 하면 재미있을까.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머잖아 빛이 보였다. 허파를 파고드는 공기에서 단맛이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구해준 그 남자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자기 할 일 끝내고 간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그날로부터 15년 뒤, 나는 소방관이 되었다.


 여기까지 읽고 목숨을 구해준 남자를 따라 용감한 소방관이 된 소년의 일대기 같은 걸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이 책에 그런 내용은 없다. 화마를 물리치는 소방관의 이야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의 이야기도 없다. 대신 술 취한 고등학생을 달래서 집으로 보내고, 유가족의 눈치가 보여 시신에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하며, 자살 현장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내 가족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쩌나 겁을 집어먹는 소심하고 멋없는 소방관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야기의 배경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이상한 나라다. 거기엔 가난보다 더한 가난과 죽음만도 못한 삶, 그리고 로맨스 소설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진한 사랑이 뒤섞여 있다. 그곳에서 나는 매일 토끼굴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5년 간 23만 5천 킬로를 뛴 낡은 구급차를 타고 달린다.


 이 책은 그런 소방관이자, 어느 평범한 아빠의 기록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