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초등학교 교문 앞은 온통 노란 물결이다. 절반은 태권도장에서 온 차고 나머지 절반은 영어학원 차량인데, 중간중간 피아노 학원에서 온 차가 섞였다. 나 어린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식들이 하나 같이 외국어에 능통한 태권보이(우먼)인 동시에 때때로 드라마 주인공처럼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 같다.
첫째는 팔다리가 가늘고 기럭지가 길다. 그래서 하교하는 걸 보면 휘적휘적 갈대가 걸어오는 것 같다. 뼈마디에 살점이 얇게 붙은 만큼 근력도 약해서 저보다 좀 짤막한 동생이 맘먹고 힘싸움을 할라치면 매번 아빠한테 이른다. 제 입에서 운동 배우고 싶단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싶었다. 저러다 조금만 더 크면 동생한테 잡아먹힐 것 같았다.
태권도 배울래?
싫어요.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운동은 해야 해.
운동하기 싫어요.
어쩔 수 없어. 하고 싶은 거 있니?
없어요.
고민 좀 해보자.
그렇게 수 일을 고심하다 문득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지 않고 집중해서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를 곧잘 하는 첫째에게 그 운동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운동, 클라이밍(암벽 타기)이라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워낙 마이너한 스포츠라 운동할 장소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배울 곳은 더더욱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 집에서 한 5킬로 떨어진 암벽장에서 일주일에 두 차례 어린아이들에게 클라이밍을 가르친다는 정보를 얻었다. 태권도장처럼 픽업해 주는 차량도 없고 거리도 멀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낮에 시간이 많아 종종 백수로 오해 받는 아빠다. 하루 낮, 하루 밤을 일하고 이틀을 쉬는 근무 형태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 운동 데려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운동을 시작한 날부터 첫째는 볼멘소리였다. 암벽화는 일반 운동화와 달리 발가락을 갈고리처럼 움츠리게끔 꽉 조이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발이 아프다고 구시렁댔다. 우스운 건 입은 비죽 내민 채로 또 벽을 타긴 한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뒤에서 보고 있단 것도 잊었다. 처음 이틀인가는 뒤에서 보다가 그 이후로는 굳이 따라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첫째는 암벽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전벨트부터 풀었다. 도착하자마자 날듯이 입구로 달려가는 걸 보고 속으로 뇌었다. 됐네. 됐어.
얼마 전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세 달 만에 좀 궁금해져서 운동 마치는 시간 즈음 몰래 암벽장에 들어갔다. 첫째는 벽에 붙은 홀드(손으로 집거나 발을 얹는 튀어나온 부분)를 선생님이 즉석에서 지정하면 그 코스대로 등반하는 볼더링(bouldering)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가늘지만 몇 달 사이 제법 탄탄해진 팔다리로 거침없이 등반을 했다. 홀드가 작으면 손 끝으로 잡고, 홀드를 쥐는 것이 어려운 구간에선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중심을 잡았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는 역경사(오버행)도 여유로웠다. 아이는 작은 몸을 웅크리고, 펴고, 옆으로 틀어가며 제 스스로 벽 위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대견하면서도 씁쓸했다. 언젠가는 아빠를 뒤에 남기고 훌쩍 벽을 넘어버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등반을 마친 뒤, 어깨가 한껏 솟아 돌아서는 딸과 눈이 마주쳤다.
재밌니?
응.
재밌어 보인다.
아빠도 해.
아빠는 살이 쪄서 안 돼.
그럼 다이어트를 해.
그럴까.
벽을 넘은 아이의 몸에서 집에 오는 길 내내 열이 났다. 여덟 살 그녀는 여름보다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