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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n 27. 2023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리구두를 신고 외줄 타기를 했다. 배려 없는 말마디에 구두가 벗겨지고, 배려를 하더라도 어떤 가시가 말속에 숨어 있다가 줄을 타는 발바닥을 찔러댔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은 중간중간 올이 풀어졌다. 미친 척하고 이빨로, 손톱으로 끊어내려다 죄 없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의 우울이었다. 우울의 밑바닥엔 우울보다도 깊고 낮은 자존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한때는 당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당신의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다.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사랑해 보기로 했다. 거미가 허공에 줄을 치듯 발 밑에 끈끈한 마음의 수를 놓고, 추락하지 않도록 빼곡하게 그물을 채웠다. 다행스럽게도 그게 우리에겐 효과가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때때로 우울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안다. 당신이 귀한 사람이라는 걸 마침내 안다.




 넘어진 노인은 눈가에 찰과상을 입었다. 쓰러져 있던 그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신고를 했다. 피를 닦아내자 마른 붓으로 찍어 누른 것처럼 거친 속살이 드러났다. 다행히 활력징후는 이상이 없었다.

 넘어지실 때 기억은 나세요?

 다 나요. 다. 죄송합니다.

 병원 가서 검사받아보셔요.

 에헤이 무슨! 말하며 호인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래. 괜찮아요, 괜찮아.

 댁이 근처세요?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타세요. 모셔다 드릴게.

 창피해서 안 타.

 보호자 분 있으세요?

 없어. 마누라 죽고 혼자 살아.

 그럼, 자식분들 연락처라도...... 하고 물은 게 화근이었다. 노인은 별안간 뭐에 씐 사람처럼 돌변했다.

 야! 니가 그런 걸 물어볼 권리가 있어?

 혼자 댁에 가시면 위험할까 봐 여쭌 거예요.

 그걸 왜 물어봐, 이 새끼야!

 알겠어요. 죄송해요. 부축해 드릴 테니까 같이 걸어가시죠.


 노인은 오래도록 사람 손을 못 잡아 본 양 내 손을 쥐었다. 너무 꽉 붙들어서 아플 지경이었다. 밤거리엔 가로등 하나 없었다. 우리는 TV 불빛이 꾸물거리는 창문 몇 개를 이정표 삼아 느릿느릿 걸었다.

 동네에 소문나면 안 되는데.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데요 뭘.

 창피해서 안 되는데.


 오래된 아파트 건물을 끼고 들어간 골목에 벽돌 무늬 타일로 외벽을 두른 낡은 원룸 건물이 보였다.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다닐 만한 좁은 마당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먹어서 눅눅해진 콘크리트 벽에서 시큼한 곰팡내가 났다. 노인은 106호에 살았다. 십육만 오천 원이야. 일곱 평이야. 머쓱한 듯 뇌는 그 말에서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게 느껴졌다. 집 문을 열자 현관에 이어진 좁은 부엌이 보였다. 부엌 좌측으론 침대와 식탁만 덩그러니 놓인 방이 한 칸 있었다. 주취자를 귀가조치 시킬 때면 대개 집인지 쓰레기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장소가 기다리고 있는데, 노인의 집은 놀랍도록 말끔했다. 노인 혼자 사는 집 특유의 악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맨 정신이었다면 119를 부르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희 이제 들어가 봐야 해요.

 조금 있다 가. 커피는 없어.

 커피 때문이 아니고, 출동 걸릴 수도 있어서 그래요.

 정말 고마워.

 뭘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오지 마세요.

 노인이 악수를 청하며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해서 애를 먹었다. 벽 한쪽에 처연하게 걸려있던 십자가가 제 몫을 하리라 기도 비슷한 기대를 하며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만 부끄럽다. 외로움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만 부끄럽다. 드넓은 우주에 홀로 쓰러진 노인은 그래서 부끄러웠고, 손을 내민 나에게 성을 냈다. 누군가는 욕지거릴 하는 당신을 욕했겠지만 부서져라 내 손을 쥐는 당신에게서 나는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언제라도 다시 만난다면 또 손을 내밀 것이다.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일곱 평 월 십육만 오천 원짜리 방에도 사람이 산다. 그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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