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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l 13. 2023

아빠, 인생 별 거 없어

 첫째 책가방을 정리하는데 뭐가 툭 떨어졌다. 활동지를 접어 작은 책자로 만든 물건이었다. 그림책 ‘노란 우산’ 속 장면을 문장으로 표현하고 이야기를 창작하는 활동을 한 모양이었다. 검색해 보니 ’노란 우산‘은 글은 없고 그림과 음악으로만 이루어진 책이었다. 그림 작가 류재수 선생님과 작곡가 신동일 선생님이 합작인 이 작품은 책자와 함께 동봉된 음악 CD를 제공함으로써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듣는 독특한 감상 방식을 취한다. 학교 책상에 앉아 두 눈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수채화를, 두 귀엔 빗소리를 닮은 피아노를 담는 첫째의 모습이 그려졌다. 빗물처럼 마음도 내려앉는 장마철에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하고자 하는 담임선생님의 배려가 그대로 느껴졌다.

 

 노란 우산과 파란 우산이

 우정을 나눕니다

 어느새 빨간 우산도 와서 짝을 이루고

 녹아내리는 듯한 빗소리에

 알록달록한 무지개 빛깔이 걸어가며

 알콩달콩 모이네

 동글동글 우산들이 모여모여 다가가

 학교로 가고,

 말랑말랑한 듯한 웅덩이들

 우산들이 우산 꽂이에 쏙쏙!


 끝이 뭉뚝한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이었다. 아이의 마음이 거울처럼 글에 담긴 것 같았다. 거기엔 오랜만에 펼쳤더니 우산살이 녹슬고 휘어 우산이 다시 접히지 않았던 기억이나, 비에 젖은 우산을 말릴 곳이 없어 너저분하게 아파트 복도에 늘어놓은 기억이나, 편의점에서 산 3천 원짜리 비닐우산이 채 두 번도 펼치기 전에 강풍에 꺾여 박살이 난 기억 같은 건 없었다. 아이의 우산은 알록달록하다 못해 알콩달콩 모였고, 동글동글 다가가 말랑말랑한 웅덩이를 지나서 학교 우산 꽂이에 쏙쏙 하고 꽂혔다. 아이의 문장은 마치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그건 마주치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무지개 빛깔로 둥글게 모여 살다가, 삶이 그친 뒤엔 하나 같이 우산 꽂이로 수렴하는 삶이었다. 예쁘고, 단순했다. 다들 그렇게만 산다면 살만한 세상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가 나이를 먹어도 이 손바닥 만한 종이에 적은 것처럼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을 진두지휘할 리더로 성장하지 않아도 좋고, 톱니바퀴에 꼭 들어맞는 규격상품이 되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우산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비로소 아이의 삶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홀로 샛노란 자태를 뽐내기 보단,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으로 어울리는 노란 우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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