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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l 24. 2023

여보, 일 안 나가?

 주말 해가 잠깐 반짝했을 때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수영장에서 내내 놀았다. 아빠는 온몸을 던져 수동으로 파도풀을 만들고, 물안경도 없이 물 밑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엉덩이를 걸치고 노는 잠수함으로 변했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첫째는 요새 제법 힘이 붙어서 짧은 아동용 라켓이 아닌 성인용 라켓을 들고도 곧잘 쳤다. 심심해진 둘째도 밖으로 나와 비눗방울을 불었다. 아내와 내겐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은 여름방학이 아득했지만 신이 난 애들을 보면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밤에는 다시 비가 퍼붓더니 첫째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밤새 뒤채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번씩 기침을 하는데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나도 저만할 때 편도가 부어서 꼭 저런 소릴 냈는데, 아픈 것도 제 아빠를 똑 닮아 나온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아프면 아이도 힘들지만 함께 있는 식구들도 고생이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사실 아이들은 저들끼리 꽁냥 거리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데 문제는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 뭐 하나 하기도 눈치가 보인다. 책을 보다가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심지어 화장실에 들어가도 신경이 쓰인다. 일요일 아침에 아내는 저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기운이 없어 뒷굽으로 바닥을 찍으며 걷는 건 덤이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여보.

 어.

 나갔다 와.

 어딜.

 그냥 나갔다 와. 나가서 차라도 마셔.

 혼자 가기 미안한데.

 괜찮아. 당신 나갔다 오면 나도 다녀올게.

 그럴까 그럼.

 가는 김에 닭이나 한 마리 사 올래? 애기 닭 좀 삶아주게.

 알았어.

 

 아내는 두 시간쯤 있다가 돌아왔다. 빵집에 들러 좋아하는 빵도 먹고 홍차도 한 잔 마셨단다. 조금 기운이 나는지 그때부터 나의 상냥한 그녀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대하는 얼굴에도 여유가 생겼다. 우울할 땐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새삼 진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닭을 삶고 죽까지 끓여 먹고 나니 엉덩이가 무거웠다. 조금만 있다가 나가야지. 나가서 뭘 할까. 카페 가서 책이라도 읽을까. 이어폰 끼고 우산 쓰고 가볍게 산책이라도 할까. 그래, 삼십 분만 자고 나가자. 그리고 딱 한 시간만 자유를 만끽하는 거야. 몰래 맥주 한 캔 사 마셔도 모르려나. 꿉꿉할 땐 시워언하게 한 잔 해줘야 되는데!

 자고 나니 시계는 세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드게임 하자고 졸라서 조금 더 집에 머물렀다. 네 시 반. 아직 저녁 시간까진 여유가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아내에게 말했다.

 나 한 시간만 나갔다 올게!

 그러자, 아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일 안 나가?

 일? 일?


 잠시 행복한 꿈을 꾸느라 야간 근무인 것도 잊고 있었다. 그래, 일하러 가야지. 가기 전에 애들 저녁거리도 만들고 가야지. 현실로 돌아온 나는 버터를 녹인 팬에 돼지고기를 볶고, 감자를 볶고, 양파를 볶아서 기깔나는 카레를 한 냄비 만들었다. 네 시 오십 분. 땀범벅이라 서둘러 찬물 세례를 받고 옷을 갈아입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나를 아내가 안쓰러움과 어이없음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쳐다봤다.


 출근하자마자 소방서 뒷마당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창틀에 올라가 잠들어 있었다. 일전에 구조된 어미 고양이가 낳은 녀석들인데, 몇 주 사이에 제법 몸집이 불어 있었다.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워 있는 폼이 세상 편안했다. 얼른 사진을 찍어 첫째 전화기로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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