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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l 26. 2023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갑다

 원래 아침 6시면 일어나는데 늦잠을 잤다. 커피 한 잔 한다고 뭉개고 있으려니 7시가 넘었다. 애들이 방학 맞아서 부모님 댁에 놀러 간 김에 어제 밤늦도록 와이프랑 수다를 떤다고 늦게 잠든 탓이다. 너무 피곤해서 손만 잡고 잤는데 엄청 야한 꿈을 꿨다. 꿈에 와이프가 나왔다.


 출근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아 급하게 끼적이는 글이다. 이렇게 맘 급할 땐 또 글에 급한 맛이 있어서 좋다. 아무 말이나 막 나오는데 그러다 보면 어쩌다 괜찮은 게 얻어걸린다. 야한 꿈 꿨다는 얘긴 괜히 적었나 싶지만 퇴고할 시간이 없다. 그냥 간다. 어제 둘이 저녁 먹으면서 나눴던 얘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나이 먹을수록 점점 야채가 좋아져. 내가 말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갑지.


 어, 그렇지. 자연으로 돌아가야지. 사람은 응당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런데 고기 구워서 밥 잘 차려놨더니 한다는 소리가. 하고 처음엔 조금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야채를 싫어했다. 마늘은 냄새가 싫고, 가지는 물컹거려서 싫고, 그중에 가장 싫은 건 씹자마자 흙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당근이었다. 아, 오이도 싫었다. 냄새는 참왼데 단맛이 나지 않은 이상한 놈이었다. 엄마가 요리에 섞어 넣는 야채는 그냥저냥 먹어서 고등학생 때까진 영양의 밸런스를 유지했지만 대학 가서부턴 개판이었다. 철저한 육식을 지향했고, 중간중간 라면을 끼워 넣었고, 술까지 퍼먹는 동안 밥을 야채와 함께 먹는 행위는 오래된 전설처럼 머릿속에서 잊혔다.


 다시 야채를 챙겨 먹기 시작한 건 장가가고 나서부터다. 와이프는 내가 불판에서 다 익은 고기를 그냥 젓가락으로 집어 먹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야채랑 같이 먹어. 야채 좀 먹어. 야채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얘길 해도 미적미적 고기만 집어 먹으려 하면 억지로 주먹만 한 쌈을 싸서 건네줬다. 처음엔 울며 겨자 먹기로 먹었다.  그래도 네가 주는 거니까 먹었다. 내 몸 생각해 주는 네 맘을 모른 척하기가 싫었다. 해서, 한 십 년을 와이프가 쌈 싸주는 걸 받아먹다 보니 야채랑 많이 친해졌다. 야채도 야채 나름의 풍미가 있다는 걸 알았고, 고기는 야채랑 함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갑지.


 그건 우리가 언젠가 먼지로 돌아가리란 아내의 통찰임과 동시에, 야채를 먹는 게 내 몸에 자연스러운 일임을 떠올리게 해주는 말이었다. 오래도록 건넨 당신의 쌈은 나로 하여금 야채의 진심을 깨닫게 해 주었다. 고기와 쌈처럼 떨어져 있던 우리가 마침내 어우러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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