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도시엔 역사가 아주 오랜 마을이 하나 있다. 어디 한옥마을처럼 유구한 세월의 깊이가 녹아 있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촌동네다. 이렇다 할 유적도 없다. 토종닭백숙과 도토리묵으로 여기 근방에만 이름이 났다.
이 마을은 육이오 때 전쟁이 난 것도 몰랐다고 한다. 산 하나를 넘어 깊은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인민군이 쳐들어 왔어도 뭐 가져갈 게 없어 금방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요즘은 마을로 진입하기 위한 등산로가 잘 되어 있어서 주말이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 완만한 코스라 아이들 데리고 산행하기 좋다. 우리 식구도 종종 이곳을 찾는다. 제 엄마를 닮아 등산하기 좋아하는 두 딸은 청설모 마냥 나무뿌리 사이를 널뛰며 쭉쭉 산을 오른다. 그러면 마을에서 한 잔 한 뒤에 불콰해져서 하산하는 어른들이, 야야, 너네 대단하다. 어쩜 산을 그리 잘 타니. 칭찬하고, 그러면 애들은 더 신이 나서 아예 산마루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뒤따르는 나와 아내만 죽을 맛이다.
마을에 다다를 즈음엔 네 식구 다 힘이 빠져서 비척비척 밥집으로 향한다. 그 마지막 몇 걸음이 가장 힘들다. 닭백숙이니 도토리묵이니 생각도 안 난다. 그냥 걸음을 멈추고 어디 퍼질러 앉아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힘내. 서로에게 하는 응원은 더 열심히 하란 소리가 아니다. 그저, 끝까지 가자. 몇 걸음만 더 걷자. 그런 의미다.
노인은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었다. 겨우 일흔을 넘겼지만 물기 없는 장작 같은 몸이라 아흔도 더 되어 보였다. 신고 당일 투석을 받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의식이 처지기 시작했다. 원래 말 걸면 눈도 마주치고 그랬어요. 노인의 아내가 말했다. 구급차 안에서 그녀는 내내 커다랗게 검버섯이 피어난 남편의 손을 매만졌다. 당직 의료지도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겠는데요. 보호자 분한테 곧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얘길 하길래 알았다고 대답만 했다. 굳이 전할 말은 아니었다.
대학병원으로 노인을 이송했다. 노인이 정기적으로 투석을 받는 곳이라 간호사들은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환자 분류 담당 간호사가 노인의 아내에게 물었다. 심폐소생술 안 하신다고 서명하셨나요? 네. 입원 수속을 밟기 위해 간호사가 환자의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동안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DNR이야? 어, DNR.
노인의 눈은 먼 데를 보고 있었다. 불러도 보고, 꼬집어 봐도 어느 한 곳만 응시했다. 그러다 점점 감겼다. 딱 한 방울. 눈물인지 그냥 물인지가 노인의 눈가에 맺혔다. 노인의 손목을 짚었지만 맥박을 느낄 수 없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을 터였다. 여보. 노인의 아내가 남편을 불렀다. 감겨 있던 두 눈이 자동인형처럼 벌어졌다. 그러다 다시 감겼다. 여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