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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ug 06. 2023

김밥이었던 것

 함께 일하는 여직원이 말했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소방서 내에선 나름 젊은 축이다.


 반장님은 극 P입니다.

 극 P가 뭔데? 알아들을 소릴 해라 좀.

 게으르다고요.

 뭐? 아냐.

 계획이 없어요.

 그건 맞지.

 지멋대로죠.

 음.

 만약에 오징어 덮밥을 시켰는데, 오징어가 안 들어 있어요. 어떻게 하실래요.

 그냥 먹는데?

 극 P입니다.


 MBTI는 기분이 나쁘다. 차라리 혈액형으로 사람을 나누던 때가 좋았다. 그건 어느 정도 반박의 여지가 있었다. A형이지만 자유분방하고, B형이지만 실제론 배려심이 깊으며, AB형이지만 또라이처럼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고, O형이지만 사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문학도다. 같은 핑계를 대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MBTI는 다르다. 사람을 16개의 성격유형으로 세분화시켜 놓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류를 그 안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너무 세세하게 설명하려는 MBTI 체계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소심하지만 불의 앞에선 용감해지는 A형이다. 혈액형 분류엔 이처럼 어딘가 뜨거운 구석이 있어 좋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 데리고 물놀이장에 왔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인당 3천 원에 시설을 맘껏 이용할 수 있었다. 차 몰고 찾아가는 데 한 시간쯤 걸리긴 했지만 그냥 드라이브한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잠깐, 이것도 그건가. 극 P? 여하튼 물놀이장 주변에는 시설 측에서 준비한 거대 그늘막이 마련되어 있어 그곳에 짐을 풀고, 애들도 풀어놓았다. 아내는 새끼들 예쁜 얼굴이 볕에 그을려 얼룩이 질까 서둘러 썬캡을 씌웠다. 자기 모자도 챙겨 와서 썼다. 내 모자는 없었다. 인생은 본래 홀로 헤쳐나가는 것이다.

 

 아침부터 두 시간 내내 물질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이럴 줄 알고 집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 세 줄을 포장해 왔다. 제육, 진미채, 아이들 먹을 치즈김밥이었다. 환경오염이 우려되어 집에 있는 작은 스뎅 김치통에 김밥을 받아왔다. 김치통 뚜껑을 열자, 거기엔 김밥은 보이지 않고 김밥이었던 것이 비빔밥처럼 엉켜서 통 위쪽을 뒤덮고 있었다. 다행히 아래쪽 김밥 두 줄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육김밥이었던 그것이 줘 터져서 에어백 역할을 해 준 덕으로 아래쪽 김밥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밥은 애들과 와이프 건져주고 김밥이었던 건 내가 먹기 시작했다. 제육김밥 아니고 제육덮밥이라 생각하자 맘이 편해졌다. 극 P입니다. 하고 어디서 또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먹었다. 입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똑같다.


 아이들은 십 분 만에 밥을 다 먹고 다시 물에 뛰어들어갔다. 아빠도 같이 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방전이 되기 일보 직전의 몸뚱이를 일으켰다. 밤샘근무를 하고 곧장 물놀이장에 와서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물에 떠다니는 거라 힘이 덜 들었다. 등짝에 달라붙어 내내 팔을 휘저으며 아빠를 나룻배처럼 타고 다니는 둘째만 아니었으면 더 편했겠지만. 조금 있으려니까 밥 먹은 거 정리를 마친 아내가 다가와서 내 등에 올라탔다. 아이들도 어째 어째 자리를 잡아 우리 네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물 위를 떠다녔다. 무거웠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내 삶에 다시없을 무게라 생각하니 되려 감사했다.


 볕이 뜨거워도 우리는 간다. 물결 같은 시간 위를 한 몸이 되어 흐른다. 지금은, 김밥이었던 것도 막지 못한 우리 삶의 절정이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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