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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ug 25. 2023

우리 집엔 시인이 산다

 새로 산 보드게임에 한참 빠져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저녁밥 할 시간이다. 아이는 아빠와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할 걸 아쉬워하며 게임을 정리한다. 냉장고를 연다. 대파, 양파, 감자, 볶음탕용 닭을 꺼낸다. 식칼을 들어 먼저 대파를 썬다. 그동안 아이는 정리를 마치고 A4용지를 한 장 꺼내 책상에 자리를 잡는다. 연필과 색연필을 들어 작업을 시작한다. 동생이 언니에게 놀아달라고 떼쓰지만 짐짓 진지한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잠깐만 기다려.


 간장과 굴소스, 미림으로 만든 양념장을 야채와 고기가 함께 익어가는 냄비에 붓는다. 근사한 냄새가 난다. 아이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요리하는 걸 구경한다. 국자로 국물을 조금 떠서 후후 불어 아이에게 건넨다. 한 입 맛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작업에 열중한다.


 국물이 거의 냄비 바닥까지 졸으면 요리의 완성이다. 젓가락으로 감자를 찔러서 수월하게 들어가는지 확인한다. 지난번엔 너무 오래 끓여서 감자가 퍼지는 바람에 요리를 망쳤다. 다행히 오늘은 형태도 무너지지 않고 익힘 정도도 적당하다. 끓는 과정에서 떨어진 자투리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맛을 본다. 맛나다. 미리 익혀둔 넙적 당면을 넣고 마지막으로 한소끔 끓여낸다. 요리를 접시에 담아내는 동안 아이도 한 시간 여에 걸친 작업을 마무리한다. 식탁에 요리가 오르고, 아이의 작품도 옆에 놓인다. 밥 먹기 전에 한 번 보시라는 신호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초고를 대하는 심정이 된다.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본다.


 보기만 해도 아름답지만

 가시가 있는 덩굴이 내 마음을 찌른다

 가시가 나서 만지지 못해 슬픈 장미

 눈물 흘리며 덩굴을 이룬다


 8살 너에게 장미는 그런 의미구나. 기특하면서도 씁쓸하다. 시인의 마음을 타고난 아이가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고 아프게 살런지 염려가 된다. 지금 나는 너에게 크고 든든한 나무 한 그루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눈물 흘리며 가시 돋친 덩굴을 이룬들, 네가 아빠의 몸을 칭칭 감고 올라가 장미보다도 붉게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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