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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12. 2023

드디어 밝혀진 아내의 정체

  아내가 요즘 수상하다. 새벽 5시면 눈을 떠서 생전 안 보던 드라마를 본다. 제목은 무빙. 단순히 재미로 보는 것치곤 지나치게 심취해 있다. 어두컴컴한 작은 방에서 손바닥만 한 모니터로, 게다가 그 좋아하는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드라마를 보는 데엔 어떤 일반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남자배우가 잘 생겼나? 그럴 리가. 내 아내는 그런 데 관심 없는 사람이다. 알아보니 드라마는 국정원 소속의 초능력자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설마, 그런 거였나.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아내는 내게 정체를 숨겨온 것이 분명하다.




 나는 원래 투다리에서 가볍게 맥주 한 잔 하는 걸 좋아라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부터 아예 못 갔다. 투다리 가서 한 잔 어때? 하고 물을 때마다 아내는 질색팔색을 했다. 어렸을 때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이후로 그곳 안주 냄새도 맡기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요즘은 애들 성화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한 차례씩 들르지만, 아내는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자는 말에도 몸서리를 쳤다. 여기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당시 사장이란 사람이 매 끼니마다 식사로 아이스크림을 줬다고 말했다. 그것도 날짜가 지난 것만 골라서.


 처음엔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수준 정도로 생각했지만 같이 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햄버거를 먹다가 혹시 맥도널드에서도 일해봤는가 물으면 롯데리아에서는 일한 적 있노라 말했고, 언젠가 여행 중에 휴게소에서도 일해봤는가 물었더니 한참을 라면 담당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궁금해서 뭔 일 해봤는가 물으면 절반 정도는 경험이 있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파악된 것만 투다리, 배스킨라빈스, 돌솥밥, 막창집, 한의원, 치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중국집, 롯데리아, 카페 1, 카페 2, 카페 3, 학습지 선생님, 놀이공원, 휴게소 라면 담당, 회사 경리, 마트 캐셔 겸 경리, (자칭) 시청 인간복사기 등등이다. 어제는 글쓰기에 앞서 또 무슨 일을 해 봤는가 궁금해서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왜.

 당신 전에 얘기했던 거 말고 또 어떤 일 해 봤어?

 그건 또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또 나를 땔감으로 쓰려는 거지.

 땔감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아냐?

 점심은 뭐 먹을까. 맛있는 거 먹자.


 아무튼 아내는 단기 아르바이트 위주로 일을 하거나 한 직장에 꾸준히 머물지 않았다. 자기 말로는 쉽게 싫증을 내는 성미에 더해 워낙 낯을 많이 가려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게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 9년 전 나 일하는 직장까지 찾아와서 만나자고 적극 공세를 퍼부은 것이나, 만 8년을 싫증 내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서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말했다시피 이 드라마는 국정원 소속의 초능력자에 관한 이야기고 아내는 거기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아내는 안 해본 일이 없다시피 한 사람이다.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녀는 사실 국가가 지시한 특별한 임무를 띠고 나에게 접근한 국정원 요원인 것이다. 그럼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당신이 먼저 내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이나, 오랜 시간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것도 말이다.


 언젠가 아내가 국가의 명령과 나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당신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자주 손을 잡아야겠다. 눈 마주칠 때마다 끌어안아서 당신의 총구가 나를 노리지 못하고 바깥을 향하도록 해야겠다. 그렇게 내 목숨을 보전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무슨 명령을 받고 나에게 접근한 걸까. 그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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