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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24. 2023

묘비명을 정했습니다

 이 글은 달리면서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리면서 초고를 완성했고, 샤워하면서 퇴고를 마친 뒤, 앉아서 정리만 하는 글이다. 뜬금없이 달리기냐고 묻는다면 요새 옆구리에 살이 좀 붙었다. 언젠가 전직 트레이너 소방관의 다이어트 비법을 공개하겠노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사실 별 거 없다. 아침밥 먹기 전에 달리는 게 최고다. 달리기 전에 블랙커피 한 잔 하면 대사량이 늘어나서 좀 더 빨리 살이 빠진다. 밀가루, 설탕 끊고 3개월간 하루 40분 열심히 달리면 평균 10킬로는 빠진다.


 새벽 5시 30분 알람에 맞춰 일어났다. 글쓰기나 독서로 하루를 시작하면 어쩐지 눈을 뜬 뒤에도 침대에 뭉개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달린다는 생각을 하자 몸을 일으키기가 쉬웠다. 레깅스를 입고 운동복으로 쓰는 쫄티를 입었다. 허벅지고 가슴이고 터질 것 같아서 답답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전신 거울을 한 번 봤다. 정말 못 봐주겠구나.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니.


 멀찍이 어둠에 잠긴 산이 보였다. 곧 해가 뜨려는지 산자락은 주황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빛나는 띠를 둘렀다. 그 위로는 아직 잠이 덜 깬 하늘이 허연 거품 같은 구름을 쥐고 연보라색 파도가 되어 흘러갔다. 길을 따라 점점이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꼭 별자리 같았다. 가로등을 길잡이 삼아 달렸다. 두 번 코로 짧게 숨을 들이쉬고 한 번 입으로 내쉬었다. 쉭, 쉭, 후우. 쉭, 쉭, 후우. 호수를 따라 난 길로 들어섰다. 날파리 떼가 중간중간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대한 군집을 이루며 떠다녔다. 결국 한 마리가 오른쪽 눈에 들어갔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백 미터쯤 달리자 눈물에 익사한 벌레가 눈가로 밀려 나왔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꽤 빠른 템포로 달리던 날씬한 남자. 가까워졌을 때 얼굴이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뒤로 걷던 아주머니. 예쁜 트레이닝복을 입은 예쁜 여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백발을 휘날리며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노인. 그중엔 머리가 땀으로 다 젖어서 없는 머리숱이 더 없어 뵈는 나도 있었다.

 한참 달리니 기분이 좋았다. 심장이 펑펑 튀어 오르고 뇌이랑을 따라 굽이굽이 시원한 바람이 들이치는 느낌이 들었다. 나 자신을 잊고, 아까 본 예쁜 여자도 잊고, 머리숱도 잊었다. 달리기 자체가 된 기분이었다. 하루키 아저씨도 자타공인 달리기 중독자라 묘비에 '러너' 하루키라 적어달라고 말한 게 얼핏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의 묘비엔 무어라 적으면 좋을까. 나의 달리기가 끝나는 날에 어떤 말을 세상에 남겨야 후회가 없을까.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시계는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든 가족들이 깰까 봐 물줄기를 작게 해서 샤워를 했다. 물기를 닦고 커피 한 잔 하려는데 아내가 잠을 깨서 거실로 나왔다. 팬티 뒤집어 입었어. 보자마자 얘길 했다. 괜찮으면 그냥 입어. 놀리듯이 또 덧붙였다. 민망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래서 뒤집힌 팬티 차림으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아까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마누라한테 잘해라.


 후대에 이 말을 남겨 나의 죽음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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