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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Nov 20. 2023

행운아

 소방서에서 나와 외곽도로를 타고 십여 분쯤 달리면 농공단지가 나온다. 상하수도 파이프를 만드는 공장이며 각종 화학물질을 제조하는 공장 등이 널찍한 부지 곳곳에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이날 출동을 나간 곳은 주조공장이었다. 이른바 술 빚는 공장, 그중에서도 막걸리를 만드는 곳이었다.


 입구에는 공장 관계자로 뵈는 사람이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구조대와 함께 출입문 안쪽으로 걸어갔다. 내부는 침침한 형광등 불빛만 껌뻑이고 있었다. 관계자는 저만치 앞에 까마득한 어둠이 입을 벌린 복도 안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윤곽만 반짝이는 그의 모습이 꼭 유령 같았다. 저승길 같은 복도 끝엔 지름이 오 미터, 높이도 오 미터쯤 되는 커다란 원기둥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었다. 요구조자는 입구 안쪽에서 한 팔을 들어 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팔이 머리 위쪽 어딘가에 끼어서 억지로 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기계를 점검하는 중에 원기둥을 회전시키는 거대한 톱니바퀴와 체인 틈으로 팔이 딸려 들어간 것이었다.


 톱니와 체인 사이를 유압 전개기로 벌려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톱니 위에 팽팽하게 감긴 강철체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술 빚는 기계를 역방향으로 돌리면 쉽게 팔이 빠지지 않을까란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끼어있는 상태에서 기계를 재시동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가장 현실성 있는 방법은 팔이 끼인 주변을 동력절단기로 자르는 것이었다. 동력절단기의 날이 두터운 톱니 위에서 한참을 회전했다. 요란하게 불꽃을 튀겼지만 톱니는 겨우 몇 밀리미터가 잘려나갔다. 잘려나갔다기보다는 자국을 남겼다는 표현이 맞겠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남자의 정맥로를 확보하고 수 분 단위로 생체징후를 측정했다. 요구조자는 구조작업 초반에 안도감 탓인지 한참을 짐승처럼 울부짖었으나 작업이 점점 길어지자 작은 신음소리만 내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나마도 멈췄다. 어서 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긴박함이 지루함으로 바뀔 만큼 시간이 지났다. 동력절단기의 회전이 멈췄다. 덩달아 파쇄음도 멈췄고 대신 고막 안쪽으로 찌릿한 이명이 파고들었다. 요구조자의 오른팔이 드러났다. 목장갑을 낀 손은 완전히 뭉개졌고 톱날과 체인 사이에 끼어있던 손목 부분은 누가 뜯어먹은 것처럼 한 움큼이 없었다. 오른손만 따로 장례를 치르듯 생리식염수를 부어 세례를 주고 거즈를 겹겹이 덧댄 뒤 압박붕대로 상처가 보이지 않게 칭칭 감았다. 관계자를 통해 환자의 신상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인데 그는 이곳 공장의 정식 직원은 아니라고 했다. 말하자면 일용직 노동자였다.


 가끔 방 한구석의 낡은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날이 그랬다. 사실 피아노는 내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연인 같은 느낌이었다. 피아노를 보면 음악을 하겠다고 서울로 상경했던 20대의 어느 날이 떠오르고 그렇게 허송세월했던 몇 년이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으니 또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진 못했지만 사랑한 기억은 분명했고, 사랑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아직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이 내 손 끝에 남아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앞으로 한 손으로 밥벌이를 할 텐데 양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내 모습이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아 죄지은 마음도 들고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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