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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09. 2024

몸으로 때우는 이사

    집 매매로 내놨어요. 집주인이 말했다.

    네? 여기서 애들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됐어요. 제가 관리하기가 좀 벅차서.

    아아, 네.

    전세 만기까지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집 알아보셔요.

    알겠습니다.


 까짓 거 뭐, 구하면 되지.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 홀라당 6개월이 지났다. 만기까지 2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급하게 매물을 구했다. 원인은 잘 모르겠는데 전세가 너무 귀했다. 두 달 안에 들어갈 집을 찾지 못하면 독립하기 전 몇 년처럼 꼼짝없이 아버지 엄마 시골집에 얹혀 살 판이었다. '다시 시집살이를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브런치북으로 만들면 히트를 치겠다 싶으면서도 와이프도 날 한 대 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나 저 제목을 가져다 쓰실 분이 있다면 마음대로 쓰셔도 좋습니다. 대신 출처는 꼭 밝혀 주세요.


 초등학교를 옮기기 싫어서 근처의 아파트 단지를 수소문했다. 그러다 평균 매매가보다 천만 원가량 저렴한 매물을 발견했다. 이 정도면 매매지만 대출을 조금만 더 받고도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부동산 중개인과 처음 그 집을 찾은 날,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우릴 맞았다. 여기서 좋은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말했고, 나는 마음이 급해서인지 아주머니의 신뢰가 가는 표정 덕인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이 집이 내 집이 되리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주 대충 집을 보진 않았다. 일단 집은 아파트 외벽이 아닌 중앙에 위치했고, 정사각형의 일반적인 아파트 구조였다. 남동향이고, 거실창 쪽이 탁 트여 있어서 해가 잘 들었다. 외벽에 위치한 데다 부엌이 오각형이었던 이전 집에 비하면 분명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리라 생각했다. 이후로 몇 집을 더 보긴 했지만 이 집이 제일 나았다. 여기서 좋은 일이 많았어요. 그 말이 내게도 현실이 되리란 기대도 한몫했다.


 이사는 순조로웠다. 대출도 제때 나왔고 이사 업체도 날짜에 맞춰 섭외했다. 내 집이니 도배장판은 해야겠다 싶어 그쪽 일 하시는 잘 아는 삼촌에게 부탁드렸다. 입주 청소를 어찌할까 고민이 되어 아내에게 물었다.

    청소는 어떻게 할까.

    우리가 하지 뭐.

    그냥 사람 쓰는 게 어때?

    오십만 원도 더 들어. 그냥 우리가 해.

    그럴까, 그럼.

 아내가 괜한 고생을 할까 물은 거였는데 저렇게 나와준다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아내까지 입주청소를 신청하지 않은 걸 후회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배장판을 말끔하게 해놓고 나자 낡거나 청소가 되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자국이 겹겹이 묻은 창문이나 기름때에 찌든 선반 같은 것도 문제였지만 욕실이 말도 못 하게 심각했다. 남의 집 화장실이라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친 게 화근이었다. 욕실은 공포영화 로케이션으로 써도 좋지 싶었다. 격자무늬 창 틈틈이 발라놓은 백시멘트는 곰팡이가 슬어 새까맸고(그래서 처음엔 검은 실리콘을 사용한 줄 알았다), 세면대 물이 내려가지 않아서 살펴보니 세면대 아래 낡은 플라스틱 배관에 머리카락이 미어지도록 들어차서 한쪽 면이 터져 있었다. 거울에도 곰팡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거울에 생긴 흰 곰팡이는 유리면 안쪽까지 파고들어 마치 화장실에 비가 내리는 것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멋대로 실리콘을 발라놓은 변기의 모습은 더럽다기보단 처참했다. 나와 아내는 꼬박 삼일 동안 지옥에서 온 화장실을 사람이 쓸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죽어라고 수세미로 문댔다.


  청소를 대강 마친 뒤에 나는 배관공으로, 전기 기사로 빙의했다. 예의 세면대 배관은 뜯어 버린 뒤 새 걸로 교체하고, 샤워호스 매달 곳 하나 없었던 부스에는 아버지 도움을 받아 벽을 뚫고 레인샤워 수전을 설치했다. 멀쩡한 조명도 거의 없었는데 심지어 현관 센서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명가게에서 식탁 조명, 현관 센서등, 안방등, 애들 방 조명, 거실 수면등, 화장실 매립등까지 죄다 사서 갈아 끼우니 조명 값만 이십만 원이 넘었다. 좋은 일이 많았어요. 그 말에 속았다기 보단 그 말을 기어코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일을 마쳤다.


 우리는 너덜거릴 때까지 정리를 했다. 덕분에 지금은 아주 멀끔한, 새집까진 아니어도 꽤 준수한 상태의 집으로 변모했다. 이사한다고 손만 잡고 잔 지도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애들 겨울방학이라 계속 손만 잡고 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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