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 의도치 않게 N잡러가 된 대학원생, 남, 30세
알러지약 알러퀵
디월트 임팩트 드라이버, 해머 드라이버, 직쏘 등 공구 구매
수입 4,955,560원
지출 2,041,540원
운이 좋아서 지난 3개월간 수익은 회사 다니던 때의 월급을 훨씬 상회했다. 올해 전체로 보면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번 것은 아니겠지만, 일시적이라도 회사의 수익을 넘는 경험은 기분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바쁜 시기를 보내느라 퇴사를 결심했던 이유가 되는 일들에 힘을 쏟지 못했다.
2번째 학기가 개강했고,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면서 멍때리는 시간을 가졌다. 3개월간 쓴 글과 달력을 보는데, 너무 비좁고 숨 쉴 틈이 없다. 바쁘다는 건 좋은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도 떳떳할 핑계가 되기에 하반기에 부담이 줄어들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당장 적용되지 않음을 간과했다. 그러니까 나는 3개월 전에 내린 결정들
때문에 당분간은 쉴 수 없다.(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과 생각들이 단기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꽤 오래 들뜬 마음으로 살았다. 기뻐서 들뜬 게 아니고, 분주한 마음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사무적으로 대했다.
엄마한테 전화한 게 언제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것 같았다. 단순히 일을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는 방식과 일부는 잠시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 선택하고 싶다. 그리고 좀 더 따뜻한 방식이면 좋겠다. 9월부터는 다시 기존 월급의 절반 수준으로 돌아갈 것 같다.
1·31일 | 용돈 150,000원
아빠가 주는 용돈은 너무 좋지만, 계속 의지하게 될까 봐 용돈을 주지 말라고 했었다. 연희동에 도자기 선생님과 약속이 있어 집에 잠깐 들렀는데, 어떤 책(『돈의 속성』)이 정말 괜찮다며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펼쳐보니 5만 원권 2장이 있었다.
건축사 시험 1주 전이었지만, 할머니를 보내드린 후 첫 번째 벌초는 빠질 수가 없었다. 작년 12월 퇴사 직후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가 갑작스럽게 할머니 장례를 치렀고, 그러고 나서 겨울 동안 했던 유일한 일이 건축사 시험공부였기 때문인지, 남은 건축사 시험 과목을 준비하면서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몇몇 작은 추억들보다도 압도적으로 큰 것은 쓸쓸함에 대한 생각.
이번 토요일로 제도판 앞에서 쩔쩔매는 일이 끝날지 겨울에 또다시 이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번에 떨어져도 그건 그거대로 괜찮겠다 싶었다. 아빠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시험 앞두고 고생했다며 5만 원을 줬다.
3일 | 캠핑 의자 57,800원
나는 거실을 오피스처럼 해놔서 집에 소파도 TV도 없는데, 몸이 지치니까 잠깐만 누우려고 해도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약간 부끄럽지만 저렴한 캠핑 의자를 하나 구입해서 잠깐씩 반쯤 누워 쉬었다. 확실히 침대에 눕는 거보단 다시 일로 복귀하기가 쉽고, 잠에 들어도 금방 깰 수 있다.
3일 | 알레르기약 알러퀵 3,000원
바쁠 때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168시간이 되는데, 8월은 4주가 아니라, 744시간이었다.33 환절기에 알레르기 증상을 많이 앓으면서도, 알레르기약을 먹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객기) 이었지만 해내야 할 일들을 위해서 자존심을 굽혔다.
7일 | 닥터피엘 간이정수기 56,800원
더운 여름에는 물 사 오는 것도 일이라 그냥 간이정수기를 샀다. 나는 이상하게 쿠팡에서 물 주문하는 것이나 배달 음식에는 손이 잘 안 간다.
12일 | 사사프라스 재킷 245,000원
가을을 대비하는 옷을 샀다. 지난번에 티셔츠를 구매했던 가드닝 기반 브랜드의 체크 재킷이 마음에 들었다. 9월부터는 소득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서 어쩌면 마지막 사치일 수도 있겠다.
19일 | 미국으로 보내는 우편 2건 700원(860원 우표 할인)
환기미술관에서 일하셨던 지인분이 환기미술관에서 발행한 기념 우표를 주셔서, 인스타에 자랑을 했는데 미국에 있는 분들만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기념으로 환기미술관 우표를 하나씩 붙였는데, 환기미술관 우표를 붙여서 미국에 보내도 우표 금액만큼 할인을 해준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금방 볼 것도 아니고, 어쩌면 오랜 기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었다. 내가 대학원 가는 것을 고민할 때, 선택할 수 있음과 없음은 다른데 네가 선택지를 만든 건 대단한 거라고 말해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썼다. 미국에 가기 전 나에게 오즈의 마법사 원서를 주고 간 사람에게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응원하는 큰 응원의 답장을 썼다. ‘When you get to OZ do not be afraid of him, but tell your story and ask him to help you. Good-bye, my dear.’라는 문장을 올해 100번 이상 되뇌었다.
19일 | 조의금 50,000원, 쏘카 66,150원
8월은 종종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지냈기에, 친구 할머니 장례식에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출근 시간에 운전해 본 건 처음이라 반납할 때 20분인가 늦었는데 쏘카 페널티를 내고 추가 요금을 내니 15,000원 정도가 더 들었다.
20일 | 공구 총 2,000,000원
창업지원사업 자금으로 가구 실험에 필요한 각종 공구를 구입했다. 실패할 만한 걸 해보라는 누군가의 말 때문에 자주 의심스럽고 종종 헛웃음 나는 작업과 실험을 하고 있는데, 연말에 그 조언을 해준 사람을 정말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공구들이 집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는, 이렇게 크고 거친 애들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집이 좁아졌고, 그냥 거실 가운데에 펼쳐둔 채 내가 우회하면서 다녔다. 바쁜 한 달을 보내다가 하나씩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줬다.
가장 무더운 여름, 날마다 주차장 한편에서 각목을 자르고 못을 박았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드는 일이 너무 어렵고 무겁게 느껴진다. 구멍 뚫고, 나사 박는 일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