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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가계부 : 여름엔 수영

D : 놀고 싶은 3년차 직장인 (금융권 대기업), 여, 26세

by 모초록

정동진 영화제 1박 2일

250,000


제주도 스시 오마카세 런치

130,000



더워진 날씨만큼 조금 더 단순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노력했다. 인생사 선택의 기준이 귀찮음과 재밌음 두 가지로 정해진다고 느꼈다. 귀찮으면 하기 싫었고 재밌으면 하고 싶었다. 나머지 것들은 상관이 없었다. 이게 좋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수영을 많이 했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게 즐거웠다.


3–4일 | 정동진 영화제 약 250,000원

여름을 맞아 정동진 영화제에 갔다. 강릉행은 KTX 노선 중에 제일 좋아하는 노선인데, 첫 번째 이유는 가는 길에 고등학교가 보여서 반갑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정동진역 전후로 새파란 바다를 왼쪽에 끼고 가기 때문이다. 그게 좋아서 꼭 왼쪽 창가 자리를 잡고는 했다. 그 바다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물회에 생선구이를 먹었다. 사장님이 영화제에 온 친구들이냐며 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어쩐지 여름 방학 때 할머니네 집에 놀러 온 중학생들 같았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기도 했다. 소화할 틈도 없이 옷 갈아입고 바다에서 해수욕을 했다. 정동진 바다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고, 물고기는 많았다. 보라카이 여행 갈 때 세트로 샀던 스킨스쿠버 장비를 하나씩 끼고 한참 스노클링을 했다. 그러고는 양산으로 얼굴만 간신히 가리고 비치타올 위에 누워있었다. 바로 누워도 옆으로 누워도 시야엔 온통 파란색뿐이었고 그래선지 잠도 솔솔 잘 왔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 둔 노래가 점점 작아졌다.


너무 늦게 알아본 탓에 간신히 예약한 숙소는 너무 웃기게도 모든 게 3개씩 있었다. 주황색 조개 모양 헤드를 가진 침대가 세 개. 2단 서랍장도 세 개. 샤워기도 세 개. 꼭 기숙사에 온 것 같아서 비치타올 3개도 열 맞춰 걸어두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사진을 찍었다.


해가 질 때쯤엔 정동초등학교로 가서 영화제 자리를 잡았다. 들어가는 길에 비눗방울을 불어주고 사진을 찍어주는 다정하고 귀여운 영화제다. 돗자리를 펴고 포장한 회랑 비건 타코에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영화를 보다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오랜만에 불꽃놀이를 했다. 정말 여름 방학을 보내는 학생의 마음으로 1박 2일을 보냈고, 벌써 내년 여름에 또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6일 | 서령 — 평양냉면 16,000원, 짜배기 2,000원

여름에 먹는 평양냉면은 소중한 맛이다. ‘짜배기’라는 건 처음 들어봤는데, 맥주잔에 얼음을 가득 채운 후에 소주를 온더록스처럼 부어 마시는 거였다. 마음에 쏙 드는 페어링이었다.


14일 | 당일치기 대전 여행 약 50,000원

오후 반차를 내고 대전에 당일치기로 놀러 갔다. 여유롭게 출발할 줄 알았는데 오전 내내 모니터에 불이 나게 일하느라 점심도 못 먹고 갔다. 가서 맛있는 걸 먹으려고 참았다. 국밥도 먹고, 성심당에서 다들 양손 가득 빵도 사고, 저녁도 먹었다. 아쉬워서 기차 시간을 하나 뒤로 미뤘다. 택시 기사님이 대전역 근처에서 0시 축제를 해서 가수들이 오니 가서 구경하라고 했다. 아는 가수는 없었지만, 축제 구경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음번엔 꼭 더 오래 놀자고 약속했다.


16–19일 | 제주도 여행 약 300,000원

여름이라면 제주도에서 바다 수영은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갔다. 도착하고 아라비아 핀란드의 빈티지 잔 모델의 이름을 따왔다는 그린 루스카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정말이지 노트에 써진 그대로 커피에서 리치 맛이 났다. 신기해서 드립백을 샀다.


엄마가 제주도에 1인 오마카세도 많더라며 사 먹으라고 10만 원을 줬다. 내 돈을 조금 보태서 스시호시카이라는 식당에서 점심 오마카세를 먹었다. 혼자 먹는 오마카세는 어쩐지 조금 머쓱했지만 굉장히 맛있었고 다음엔 엄마랑 같이 오고 싶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함덕 해수욕장에서 스톤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상하게 8월에는 이런 우연 같은 행운이 많았다. 처음 들은 페스티벌이었는데 근 몇 년간 갔던 페스티벌 중에 제일 좋았다. 서우봉을 앞에 두고 바다를 등지고 누워서 노래를 듣다가 더워지면 바닷가에서 수영했다. 처음 들어보는 인디밴드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목록이 모두 좋았다. 밤바다에 누워서 별을 보면서 귀에 물소리와 음악 소리가 번갈아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페스티벌이 끝날쯤엔 다들 조금씩 취해서 30분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에도 수영하러 갔다. 날씨가 무지하게 맑았고 중문 해수욕장에서 스노클링하다 강정천에 갔다. 맑은 물에만 산다는 은어가 엄청나게 많았고, 바다보다 훨씬 물이 차가워서 물안경에 자꾸만 서리가 꼈다. 샴페인을 나눠 마시고 수박을 쪼개 먹었다. 수영을 하고 또 하니까 정말 여름 같았는데 노느라 공항버스를 놓친 탓에 공항 가는 길에 택시비를 5만 원이나 썼다.


22일 | 와인 선물 40,000원

큰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 날이라 조기 퇴근을 하고 대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선물로 와인을 한 병 사 갔고 저녁은 얻어먹었다. 신나게 놀고 집 가는 길에 휴대폰을 지하철에 두고 내렸다. 다른 건 다 잃어버려도 휴대폰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핸드폰은 2호선 종착역인 용답역에 고이 놓여있었고 전원을 켰을 땐 부재중 통화가 40통 가까이 됐다. 핸드폰을 찾은 안도감과 나와 내 핸드폰을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다시는 용답역에 올 일이 없길 바라며 반성의 마음으로 청계천 산책을 조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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