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
푸치{Pucci}는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몸에 자유를 선사해 준 실루엣과 가볍고 유연한 직물 위로 화려하게 펼쳐진 프린트의 향연은 당시 상류층이었던 제트족{jet-set}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푸치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전설적인 브랜드 ‘푸치’를 만든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는 자신이 만든 상품처럼 인간적으로도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 같았죠.
그는 국가대표 스키 선수이자
세계 2차 대전에 참여한 폭격기 조종사였고
연인이었던 에다(무솔리니의 딸)를 도와 스위스로 피신시키고 훗날 나치 재판의 증거로 쓰일 무솔리니 사위의 일기를 연합군에 넘기는데 일조한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탈리아 패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약했고
노년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삶까지...
그는 삶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다 간 진정한 인생의 모험가였습니다.
바르센토 후작
그는 타고난 우아함을 지닌 신사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우아한 예술의 도시로 사랑받았던 피렌체를 의인화한다면 마치 푸치와 같았을 것입니다. 에밀리오 푸치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피렌체의 가장 오래되고 명망 높은 귀족가문 중 하나인 푸치{Pucci} 가문의 후손으로 태생부터 고귀했죠. 그의 공식적인 명칭은 '바르센토* 후작{Marchese di Barsento}'이었습니다.
* 1662년 로베르토 푸치{Orazio Roberto Pucci}가 바르센토 -풀리아주 바리에 있는 지자체- 영지를 구입한 뒤 바르센토 후작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이후 칭호는 가문의 후계자에게 계승됨
15세기에 건설되어 곳곳에 르네상스의 장식 예술이 스며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푸치 저택에서 가는 곳 어디든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자란 뼛속부터 귀족이었던 푸치는 하고픈 대로 하는 오만한 태도까지 갖춘 귀족 도련님으로 성장했습니다. 귀족 자제들의 전형적이고도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특히 예체능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펜싱, 수영, 스키, 테니스, 자동차 경주 등 다양한 스포츠를 두루 섭렵한 푸치가 가장 즐긴 운동은 스키였습니다. 취미를 넘어선 재능을 보이며 17살인 1932년 개최된 동계올림픽 시기에 이탈리아 스키 국가대표팀을 따라 뉴욕을 방문했고, 다음 베를린 동계올림픽에는 직접 출전하기도 했죠.
해외로의 여행이나 유학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던 시절, 대학교의 수업이 재미없던 귀족 도련님 푸치는 17살 잠시 맛보았던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합니다. 영지의 상속자였던 그는 지주가 되기 위해 잠시 밀라노 대학교의 농업 학부에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목화의 땅’ 조지아에서 대학교에 입학해 목화 농업을 공부하며 미국에서 몇 년을 보내게 됩니다.
활동적이었던 귀족 도련님에게는 이 또한 매우 지루한 과정이었지만, 인생에서 배운 것 중 헛된 것은 없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후에 패션을 업으로 삼았을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농업을 위한 공부였고 이때만 해도 패션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목화의 재배부터 배운 직물에 대한 이해는 훗날 캐시미어와 실크, 면과 같은 천연섬유의 직물개발 연구의 밑바탕이 되어 그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럽에 감도는 전운
1930년대 중반은 유럽 내 전운이 감도는 긴장이 고조된 시기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와의 2차 전쟁을 시작했죠. 전쟁으로 푸치 가문의 경제 상황은 매우 나빠졌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내에서 이탈리아 은행 계좌는 동결되었습니다. 갑작스레 유학 자금이 끊겨 오갈 곳이 없어진 이국땅의 돈 없는 귀족 도련님은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푸치는 운명의 개척자였죠.
돈은 없지만 여전히 귀족적인 삶을 살고 있던 도련님은 머리를 식히러 간 스키여행에서 돌아오던 길, 근처에 위치한 리드 대학의 총장을 직접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현대에는 스티브 잡스가 중퇴한 대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인문학으로 유명했던 사립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인문, 사회, 자연, 과학, 예술 등 학부 중심- 대학인 리드 대학에 푸치가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저 '매우 좋은 대학'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함이 최고의 무기였는지, 아니면 오갈 곳이 없어진 유럽의 귀족 도련님을 동정해서인지... 대책 없는 갑작스러운 개인적인 방문임에도 총장과의 만남은 성사되었고, 자신의 사정을 총장에게 털어놓은 푸치는 기회를 얻어냅니다.
거래였죠. 푸치의 이력을 들은 당시 총장이었던 덱스터 키저{Dexter Keezer}는 푸치에게 수업료와 숙식을 제공해 주는 대가로 대학의 스키팀을 창단하고 훈련시키는 임무를 제안합니다. 그렇게 푸치는 리드 대학에서 새로운 임무와 함께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패션과의 인연도 시작됩니다.
대학 스키팀의 의뢰를 받아 대표팀의 스키복을 디자인하게 된 것입니다.
푸치는 스키 선수의 경험을 녹여 기존의 부피가 컸던 스키복을 몸에 맞게 줄이고 ‘REED’를 새겨 넣은 조끼로 보온성을 높여 좀 더 기동성 있는 운동복에 가까운 스키복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모직으로 만든 따뜻한 평상복과 다름없었던 스키복은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조금씩 기능성에 중점을 두며 발전하고 있었지만, 30년대에도 여전히 운동복이라는 개념은 희미했습니다.
한껏 멋만 낸 스키어들은 기능성이라곤 고려하지 않은 듯한 밀리터리 스타일의 재킷 속에 셔츠와 스웨터를 입고 넥타이까지 맨 차림새거나, 주름진 모직 바지 위로 셔츠와 가죽재킷으로 멋을 내고 베레모로 세련미를 곁들인 프랑스 스타일의 '차려입은 옷차림'이었죠. 이러한 환경에서 푸치의 스키복은 기능성을 추구한 매우 선구자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국땅의 귀족 도련님 푸치는 공부하면서도 용돈벌이를 위해 아마도 처음 해봤을 테이블 서빙, 설거지 등의 잡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해냈습니다. 동창들은 그를 '이탈리아식 영어 악센트를 구사하면서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탱고 춤으로 유명한 잘생긴 이'라 기억할 정도로 미국의 촌놈들에게 이탈리아의 열정을 몸소 보여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937년, 석사 학위를 취득한 푸치는 자신을 보호해 주던 학생이라는 신분이 끝나자 거취를 정해야만 했습니다. 전쟁 중이던 나라는 푸치와 같은 젊은이들을 불러들이고 있었죠. 이젠 더 이상 귀국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에다 무솔리니
모험 가득한 푸치의 삶 속에서 에다 무솔리니{Edda Ciano Mussolini}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모험가였던 푸치에게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불륜 또한 도전할 대상이었을까요?
학업을 마치고 군당국의 압박에 의해 이탈리아로 돌아온 푸치는 공군에 입대해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합니다.
파시즘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꽤나 용맹한 군인이었던 푸치는 여러 개의 무공훈장을 받으며 전장을 누볐습니다. 그렇게 여러 전투에 참가한 푸치는 악화된 건강상태로 요양차 카프리에 머물렀고, 당시 카프리의 별장에서 지내고 있던 에다를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시작하게 되죠.
푸치는 매우 스포티하고 세련된 젊은 귀족 남성으로 스키 선수이자 열정적으로 카레이싱을 즐기는 공군 장교였고, 에다는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첫째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히틀러와도 직접 소통하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별명이 ‘미친 망아지’였던 에다는 자신과 매우 닮아 무솔리니가 가장 사랑하던 자녀였습니다. 호전적인 성격과 생김새까지 무솔리니를 꼭 빼닮은 모습이었죠.
20살에 치아노{Galeazzo Ciano} -이탈리아 외무장관을 역임- 와 결혼한 에다는 이후에도 여러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며 푸치도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던,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푸치는 미혼이었지만 그 역시 결혼한 여인과의 스캔들을 겁내하지 않는 플레이보이였죠. 푸치의 10대 후반시절 알프스 스키장에서의 첫 만남 이후 1941년 여름 카프리에서 재회한 둘은 연인관계가 되었습니다. 카프리의 사교계에는 조만간 에다가 치아노를 떠나 푸치와 함께 살 거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들의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다는 자신이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 푸치를 떠올렸죠.
1943년 휴전이 되고 여전히 요양 중이던 어느 날, 푸치는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장인 무솔리니에게 등을 돌려 잡혀간 남편을 구명해 주고 정부로부터 억류되어 있는 자신과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과거의 연인 에다였습니다. 푸치는 개인적인 친분과 이탈리아를 위해 옳은 일이라 생각해 에다를 돕기로 합니다. 푸치를 만난 에다는 남편 치아노가 그동안 써온 일기*를 가족 -남편 그리고 자신과 아이들- 의 생명과 교환하기 위한 협상카드로 쓸 계획을 털어놓았죠.
* 외무장관 임기(1936-1943) 동안 써 내려간 치아노의 일기는 무솔리니의 내부 세력과 나치와의 계획이 상세하게 적힌 2차 세계대전의 정치적 다이너마이트였다. 일기의 일부는 사라졌지만 1945-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로 사용되었다.
푸치는 과거 연인의 가장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애정 어린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치아노가 숨겨둔 일기의 일부를 찾아오는 과정부터 협조하게 된 푸치는 그녀의 위험했던 모든 길에 동행했고, 그녀의 아이들도 맡아 안전하게 스위스로 피신시켜 주었습니다. 에다가 스위스로 탈출할 때에는 그녀를 임신한 시골 아낙네로 꾸며 귀중한 협상카드가 될 치아노의 일기를 그녀의 코트 안감 속에 넣어 꿰매는 기지를 발휘했고, 에다를 차에 태워 직접 국경까지 데려다주었죠. 훗날 에다는 그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애정관계를 떠나서 나의 충실한 친구였던 그는 훌륭한 이였습니다.
끔찍하게 못생겼지만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고,
내가 스위스로 떠날 수 있도록 끝까지 나를 도와준 진정한 신사였습니다.
이토록 매우 솔직했던 에다는 푸치의 도움으로 무사히 스위스로 넘어갔으나 푸치는 에다가 부탁한 편지를 전달한 후 홀로 다시 스위스로 탈출하던 중 게슈타포 -나치 독일의 비밀 국가 경찰- 에 잡혀 구금되었고, 그곳에서 에다와 일기의 행방을 밝히라 요구하는 게슈타포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남자였습니다.
고문 초반, 구타로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라는 독일군의 지시에 푸치는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 있던 작은 빗을 꺼내 흐트러진 머리를 여유롭게 빗어 넘긴 뒤 대령을 보며 자신의 모습이 괜찮은지 물었죠. 푸치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는 마치 제가 다루기 힘든 버릇없는 아이를 보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습니다.
만족감을 느꼈어요.
절망적인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푸치의 개인적인 성향과 이탈리아 귀족의 지극히 이탈리아스러운 신사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가혹한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이탈리아식 위트는 곧이어 이어진 모진 고문에 사라졌죠. 푸치는 총부리가 머리에 겨눠지는 상황에서도 혹시 모를 에다의 안위에 대한 걱정 -스위스 정부가 에다의 망명을 받아들여 주었는지- 으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약 열흘간의 고문과 심문 끝에 그에겐 더 이상 얻어낼 정보나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독일군은 에다에게 '치아노의 일기를 공개하면 죽일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할 임무를 푸치에게 부여한 뒤 그를 스위스로 석방시켰습니다.
고문으로 두개골이 여러 군데 골절되고 장기에 천공이 생기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은 푸치는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스위스에 머무르며 몸을 회복시켜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몸을 추스른 뒤 전쟁이 끝난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연합군이 점령한 이탈리아에서 그의 이탈리아 공군 중위의 신분은 걸림돌이 되었고, 무솔리니의 딸을 도왔던 그의 이력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예측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 대사관의 부정적인 입장으로 귀국은 늦춰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운이 좋았던 푸치는 그의 사정을 아는 미국 정보부 직원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귀국할 수 있었지만, 푸치를 반긴 건 파산 후 기울어진 가세뿐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