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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패션의 탄생, 프린트의 왕자 II

; 인생의 제2막

by MODA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고, 어렵게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푸치는 이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다시 공군으로 돌아가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른 길로 인도하죠.

알프스 산맥의 스키장에서 우연히 미국 최고의 사진작가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때는 현대도 아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패셔너블한 스포츠웨어의 시작

성공으로 가는 길은 기본적으로 실력이 받쳐줘야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운입니다. 때때로 기회는 스스로 걸어 들어오기도 하죠.

1947년, 푸치는 휴가를 내어 스위스의 고급 휴양지인 체르마트{Zermatt}에서 스키를 즐기던 중이었습니다. 스키를 타고 있던 한 커플의 독특한 모습에 한 사진작가는 사진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의 사진작가 토니 프리셀{Toni Frissell}이었습니다.


토니 프리셀과 그의 작품들


토니 프리셀*은 미국의 상류층 출신으로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며 유명인이나 부유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담은 사진으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면서 종종 보그나 바자와 같은 패션 잡지와도 함께 작업했죠. 형제들 중 유일한 여자아이였던 토니는 매우 활동적인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모험과 스포츠를 즐기는 여인으로 성장했고, 이는 훗날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스포츠를 즐기는 매력적이고 건강한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 당시 서구사회의 많은 유명인들이 프리셀의 사진기에 담겼다. 윈스턴 처칠, 당시 교황 비오 12세, 프리다 칼로, 재클린과 케네디의 결혼식 사진 등 역사적인 사진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장 속으로 들어가 군인의 삶을 기록하는 등 광범위한 주제의 사진들을 찍었고 여러 유명 간행물에 실렸다.



풍족하지 않은 재정상태에도 인생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던 귀족 도련님 푸치는 좋아하는 스키를 즐기며 그저 자신의 흥미와 만족을 위해 스키복을 디자인해 입었는데, 당시 새로 사귄 미국인 친구를 위해 디자인한 커플 스키복을 입고 스키를 즐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사진작가 토니의 눈길을 끈 것은 여인이 입고 있던 남다른 스키복이었습니다. 후드가 달린 파카와 신축성 있는 테이퍼드(밑단으로 갈수록 통이 좁아지는)팬츠로 구성된 스키복으로 특히, 남성용처럼 중간 앞 트임으로 여며져 있던 여인의 바지에 토니는 당혹감마저 느꼈습니다.



당시 일반적으로 여성용 바지를 여미는 형태는 남성용 바지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여성용 바지는 양 옆면을 터 여러 개의 단추를 달아 여몄죠. 이는 의류의 명확한 성별 구분이 상식이던 시기에 남성용 바지와 구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남성용 바지처럼 바지 앞 중간이 트여 여미는 형태는 여성스럽지 못하며 저속하다고 여겼죠. 60년대 중후반까지도 일반적으로 여성용 바지는 옆면에 단추나 지퍼가 달려있었습니다.


1940년대 여성용 바지 광고


20세기초 서구사회의 젊은 여성들이 오빠의 옷장에서 몰래 바지를 꺼내 입는 일탈이 시작된 이래 패션시장은 여성만을 위한 바지를 내놓았지만, 여성용 바지는 사회적으로 스포츠나 휴가를 위한 옷으로만 인식*되었습니다. 사회는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것을 반기지 않았죠.

30년대 파리에서는 남성 바지를 입은 여성을 감시하며 사회적으로 제재를 가했고, 좀 더 개방적인 미국에서도 교회에 여성이 바지차림으로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캐서린 햅번, 잉그리드 버그만, 마를렌 디트리히 등 유명 배우들**이 영화와 대중 앞에서 바지를 입으며 유행을 선도했지만, 바지는 주로 패션잡지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패션리더나 상류층을 위한 아이템이었습니다.



* 바지가 여성들의 일상복으로 보편화된 주된 요인은 2차 대전 당시 일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대두된 실용적인 바지의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여배우들의 바지차림을 싫어해 촬영장에서 바지를 입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파리 생-라자르역에 도착한 마를렌 디트리히, 1933년 5월


1933년,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독일출신 스타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남성용 정장을 입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언론은 그녀의 '남성적인 옷차림'에 대해 대서특필하며 논평했고, 미국 언론은 '파리의 경찰서장이 디트리히가 남성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 당시 파리에는 남성처럼 옷을 입고자 하는 여성은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규정(놀랍게도 2013년까지 존재 -1800년 제정- 했던 조례로, 체포될 수도 있었지만 사실 처벌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여성들의 바지차림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이 존재하며 여성들의 옷차림을 사회가 간섭하고 통제했지만, 사실 파리는 스타의 방문을 반겼고 그녀의 남성적인 옷차림에 대해 만평을 하는 정도였다. 반면 미국 신문은 디트리히가 분개한 파리 경찰청의 공식 경고문을 받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30년대 패션잡지들은 여성의 바지가 허용되는 장소와 바지를 입는 방법에 대한 주제를 자주 다루며 통제했고, 40년대에도 활동하는 낮에는 그렇다 쳐도 저녁모임이나 식당, 파티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1939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 패션잡지 '보그{Vogue}'는 바지를 세련되고 현대적인 여성에게 필수적인 아이템이라며 한두 벌은 가지고 있기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 형태는 잘 재단되고 주름이 잘 잡혀있는 여성스러운 슬랙스(바지)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일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편리함과 실용적인 이유로 점차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경우가 증가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죠.


전쟁을 핑계 삼아 머리를 풀어헤치고
슬랙스(바지) 차림으로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을 개탄한다!

하지만 이후 점차 시대의 변화와 필요성에 따라 바지는 여성들에게도 일상복이 되었습니다.





'Pucci'의 시작이 된 사진(1948), 비를랜드의 제안에 의해 디자인한 푸치의 스키웨어를 입은 스위스 사교계 명사 포피 드 살리스와 푸치


토니는 그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귀족이 직접 디자인한 새로운 스키복'이라는 점에 흥미를 느낀 사진작가 토니는 곧바로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전설적인 편집장 다이애나 비를랜드{Diana Vreeland}에게 사진을 보냈고, 푸치의 독특하고 생동감 넘치는 스키복에 매료된 비를랜드는 다음 겨울을 위한 유러피안의 겨울 패션에 대한 기사를 기획하죠.

기사를 위한 여러 스키웨어를 푸치에게 요청했고, 이 매우현대적인 디자인의 스키복 화보는 바자의 1948년 12월 호에 'An Italian Skier Designs'이라는 제목으로 실리면서 미국인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브랜드 'PUCCI'의 시작이었습니다.


1948년 12월 호의 바자 표지와 목차


인생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길을 터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이자 행운일 것입니다. 푸치의 가능성을 본 비를랜드는 미국 시장을 위한 스키웨어 컬렉션을 제안하며 미국 백화점 '로드 앤 테일러{Lord & Taylor}'와 연결시켜 주었죠. 당황한 푸치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저는 컬렉션을 디자인하지 않아요.
저는 이탈리아 공군 장교입니다!


하지만 비를랜드는 푸치를 설득했고, 푸치의 여성용 스키웨어는 'Emilio of Capri'라는 상표로 미국시장에서 실제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삶은 언제나 그만한 대가를 주게 마련입니다.

원해서 간 곳이 아니었던 스위스에서의 반강제적인 삶은 푸치에게 대가를 선사해 주었죠. 푸치는 스위스에서 가져온 신축성 있는 직물을 사용하여 군복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기능과 패션이 결합된 당시로서는 매우 센세이셔널한 스키 슈트를 만들어냈습니다. 국가대표까지 한 전문 스키어로서 평소 불편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그저 원하는 색상과 형태의 스키복을 디자인한 것이었지만, 패션계는 열광했죠.

푸치가 바자를 위해 새로 디자인한 스키복은 부피가 크고 무거웠던 당시의 일반적인 스키복과는 달리 신축성 있고 공기역학을 활용하여 보온성을 높인 기능성 직물을 이용한 파카와 팬츠를 연결한 원피스형의 우아한 실루엣으로, 무엇보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도 추위에 떨지 않고 스키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운동복에 ‘패션’이 장착된 시도로, 오늘날 기능성을 바탕으로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의 스포츠웨어 토대를 마련한 이가 바로 푸치입니다. 푸치 덕분에 이제 편안함과 기능성이 최우선이었던 운동복도 욕망의 대상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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