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순환시대 #0
여행자의 시선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 시선이 얼마나 다를까. 습관처럼 지나치는 삶의 공간에서의 나의 시선도 여행자의 시선처럼 색달라질 수 있을까.
“오래 살았던 익숙한 도시를 여행하는 느낌은 조금 묘하다. 도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또 전혀 모르는 도시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생경힌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더 이상 서울에서 생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시를 계속 여행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매번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 어쩌면 서울 / 글 신현호
<The Big Issue>
언젠가부터 지하철 앞에 붉은 옷을 입고 잡지를 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속으로는 대체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이지. 저런다고 팔릴까. 그래도 잡지 디자인 나쁘진 않네.
처음 신촌역 3번 출구에서 붉은 조끼의 사람을 보고 한 생각이었다.
행색이 추레하여, 차라리 구걸 보다는 저렇게 일을 히는 게 낫지 라는 생각도 했다.
그때로부터 몇년이 지났던가. 어린 나는 조금 성장해서 다시 친구와 길을 걸었다. 지나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의 존재가 나에게는 길가의 나무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저거 살까?”
친구가 물었다.
“저거? 뭐?”
은행에서 돈을 빼는데 친구가 밖을 가리켰다. 비가 와서 창밖이 흐릿했지만 붉은 조끼의 사람이람 걸 알 수 있었다.
“저분들이 파는 잡지가 노숙자 분들에게 기부되는 용으로 팔리는 건데. 노숙인 분들이 같이 협심해서 만든 거래. 나도 몰랐는데 언제 친구가 추천해서 읽어봤거든? 근데 일상 얘기가 적혔고 난 정망 너무 재밌게 읽었거든. 너만 괜찮으면 저거 내가 살테니까 같이 볼래?”
얼마냐고 물었더니 팔천원 이라고 붉은 조끼 아저씨가 말했다. 친구와 각각 하나씩 사서 다보면 교환하여 읽기로 했다.
그날도 솔직히 회사에서 너무도 정신없이 보낸 날이라 반쯤 영혼이 나가 있았다. 하루가 지났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침대에 누우면 불도 끄지 않았는데 잠에 들고, 겨우겨우 침닦고 일어나 새벽에 씻고 자는 나날이었다.
며칠 전에 산 붉은 조끼 아저씨의 잡지를 챙겨 들고, 내 오늘은 기필코 정시 퇴근을 하리라 다짐하며, 아침 1시간 일찍, 점심 시간 1시간을 근무에 반납했다.
그런데 웬걸 여기저기서 해달라는 건 많지, 연락도 많이 오지, 퇴근하려고 노트북도 다 챙겼는데, “모다씨, 이사님이 21년도 자료 요청했는데, 들으셨죠? 그거 어디 있어요?” 하고… 질문을 하셨다.
21년도 자료를 내가 어떻게 아냐. 난 23년에 취직했는데. 이러다 성격이 쓰레기가 되어 버리겠아!@$@#. (욕. 심한말) 생각을 하며 잠시 넋이 나갔는데, 그간 내가 힘든걸 아셨는지, 내 표정이 너무도 혼미하였는지, 부장님이 웃으며 “다른 분께 물어볼게요.”하고 반대편으로 가셨다.
와하하하라라라라라하라라하하하. 나는 바람처럼 조용히 가방을 들고 떠났다.
살짝 뒤를 돌아 천사 같은 부장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 예쁜 점이 있는 예쁜 천사.
그러나 여전히 몸은 몸살이 날 것 같이 혼미해져 정신이 나간 채로 길을 걸었다. 어쩌다보니 민들레도 근처에서 일을 해 골목을 따라 따라 걷다가 비에 젖은 익숙한 길이 눈 앞에 드리우자 갑자기 깨달았다.
아 맞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회사 바로 옆에 있었지.
인사동 거리였다. 순간 회사에서의 피곤함이 빗물에 씻겨가고 조금씩 내 안에 여행자의 시선이 흘러들었다. 피로로 비워지고 깨진 구석을 옅게 오는 빗물처럼 떨어져 부드럽게 메워주었다.
민들레가 일하는 카페에서 붉은 조끼의 아저씨가 “고객님 덕에 제가 행복합니디.”하며 고개 숙여 인사해주신, 기쁜 마음으로 돈을 주고 받으며 거래한 뽀얀 잡지를 뜯어 펼쳐 그 안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그래~ 이거지~ 숨결을 따라 행복이 불었다.
그렇게 펼친 종이 위에 여행자의 시선을 떠올리게 하는 활자가 입혀 있었다. 잠시 글을 읽다가 나도 종이 위에 활자를 적어 내렸다.
“언젠가 내가 다닌 출판사 여사장이 매번 길가의 상점을 보고,
- 어머, 여기 이런 게 생겼네?
- 어머, 이 집 잘 안됐나봐!
하길래, 속으로
- 뭔 상관인데. 알빠야?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 어머저거 저머저거 거리며 늘어놓은 말들이 정말로 귓가에서 필터링이 되어버려서(솔직히 사장님 별로 안좋아 했음) 문자 그대로 ’이.거‘, ’저.거’로 들렸다. 그런데 잡지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보니 그녀는 여행하고 있었나보다.“
요즘은 나도 그런다. 나도 여행을 한디. 아니 하려고 노력한다.
뜬금없지만 그래서 더 시간이 귀하다. 시간을 잘 써야 나의 일상을 흠뻑 여행할 수 있으니까.
지금 잠시 멍하니 밖을 보며 하루 중의 일을 떠올리듯이, 종종 지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본다. 의외로 이럴 때면 지나갈 때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다. 그래 오늘 그렇게 정보를 요청한 건 사실 차장님이 나를 도우려고 그러셨던 거지(그래도 혼자 하시면 더 좋았겠지만). 맞아. 생각보다 자상해 실장님. 의외로 생생하게 기억해서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보곤 하다가 종종 당시에 여유가 없어 더러워진 마음 속과 머릿 속 공간이 깨끗해지는 걸 느낀다. 조금 더 선명히 사람이 보이고, 의도가 보이며, 그때 내가 오해했구나 생각한다. 마치 시간 테잎을 뒤감고 나만 다른 시간에 사는 사람인 것 차럼. 시간을 돌려 여행해보며 여행자의 시선으로 피곤에 얼룩진 일상을 씻어낸다.
또 종종 "그래 나 참 멋있다." 하고 나를 칭찬하거나, 자신을 영웅담 주인공처럼 생각하듯, 어떤 건 나 편한대로 조금 더 왜곡해서 칭찬한다. 마치 모두가 나의 메일을 보고 메일 양식에 반했겠지 음하하하 하면서 나의 깔끔한 업무처리에 반해버린 동료들의 표정을 상상해버리는 거다. 그리고는 “그래. 오늘도 한 건 했어.” 하며 저신을 다독인다. 하하하하하 (feat-정신승리)
그래서 나는 종종 여행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삶이 얼룩지면 비오는 날처럼 모든 게 씻어지는 날도 필요하고, 우린 일상이란 습관적인 시간 속에 갇혀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만 볼 수 있는 것으로 가득한 시간 속에 있는 것일 테니까.
그대 오늘도 수고하였소
오늘도 침흘릴만큼 푹 자고 잘 쉽시다. 잘 쉬고 잘 놀고 잘 먹는 사람으로 일상을 즐겨야지(하트)
비오는 인사동 카페에서 지금 쓰는 이 글이 마무리 되어가는데, 민들레가 말했다.
“언니 가자.”
아싸. 퇴근-
이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