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적 인간의 비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 하나에 의지해 정신을 벼린다. 은은한 열기는 한낮을 넘어설 때가 많아 음악을 듣는다. 나만 아는, 언제까지나 나 혼자만 알고 싶은 음악도 좋지만 보통은 대중적인 음악을 재생한다. 조지 윈스턴 캐논. 닳고 닳아도 흔하지 않은 이상한 이 연주곡은 맘이 울적하거나 지칠 때 중심을 잡아주는 균형추가 되었다. 음악에 기대어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방치 아닌 방치의 시간 속에 감정이 다듬어지곤 했다.
음악을 듣다 보면 세상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듯 내일도 오늘과 같지 않을 거라는 확고부동한.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다니 이토록 무례할 수가. 음악도 마찬가지다. 건반의 생명이라는 게 모색과 모방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불손한 부정과 변명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연주한다는 건 뒤따르며 흐름을 잇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블랙과 화이트는 치열하고 조악하다. 생명에 비수가 있고, 암실 너머 광장이 있다. 명과 암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선상에서 음악은 탄생한다. 이것이 예술가는 자신을 경멸하고 대중은 열렬히 환호하는 까닭이다.
망중한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음악을 만들며 그 음악은 망중한 속에 사람을 빠트려 더 커다란 세계를 만든다. 이 불가해한 연속성은 밤을 밝히고 또 난 이 밤에 음악의 낭만에 붙들려 속절없이 경련만 일으킨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던 시인의 예언은 과도기 한복판에서 의심하는 모든 것들을 위한 축사의 전형이 아니었던가. 봄인지 다시 겨울인지 종잡을 수 없는 2월의 히스테리에 잠시 의심했던 하루가 길다.
https://www.youtube.com/watch?v=LNi-6-0fGFk
캐논과 건반을 이야기했는데 박정현의 Angel을 링크 건 이유는? 다음 이야기를 조금은 흘리고 싶어서.. 난 과.도.기.적.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