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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Feb 20. 2019

내 손

나무껍질 같은 할머니 손


식물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걱정이 되었던 건,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모르는데서 오는 불안함이었다. 식물은 약하니까 금방 죽을 것 같아서. 어떤 이별이라도 이별은 견디기 힘드니까. 그런데, 막상 키워보니 식물도 나도 강했다. 식물은 살아 있는 생명이고 나 역시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린 유전자에 기억된 대로 달라진 세계에 적응하는 본능이 있었다.


특별히 배우지 않았어도 나는 노랗게 변한 잎은 따 주고, 말라 떨어져 있는 잎들은 걷어 주고, 잎이 축 늘어져 있으면 물을 주고, 벌레가 생긴 잎은 붓으로 쓸어 주며,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물통에 물을 담고 EM용액을 타고, 쏟아붓고, 가위로 시든 가지를 잘라낸다. 마른 화분은 물통 안에 담아 흠뻑 목욕을 시켜준다. 끊임없이 시간과 품이 들어감과 동시에 불안은 잦아들었다. 대신 손 마를 날이 없었다.


물끄러미 내 손을 내려다본다. 손바닥 피부가 두껍고 뻣뻣해지고 있다. 할머니 손과 닮았다. 할머니 손은 손바닥이 나무껍질 같았다. 손톱까지도 두꺼운 신기한 손이었다. 할머니 손바닥을 만져 보다가 뒤집어 손등을 보고, 손톱을 만져 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손이 이렇게 두꺼워질까. 할머니는 그 손으로 뜨거운 냄비도, 손이 데일 것 같은 스텐 밥공기도 척척 옮기셨다. 정말 편리한 손이었다. 부러웠다.


"할머니, 할머니 손은 대단해. 뜨거운 밥공기도 맨손으로 들고. 어떻게 하면 그런 손을 가질 수 있어?"

"일을 많이 하면 그렇게 되지."

"어떤 일을 많이 하면 되는데?"

"집안일을 많이 하면 되지."

"집안일은 어떻게 하는 건데?"

"집안일하지 말고, 공부해라."

"그럼 할머니 손을 가질 수 없는 거 아니야?"

"이런 손, 안 가져도 된다."


할머니는 이런 손 안 가져도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식물을 많이 키우고 꽃을 배우면서 내 손은 점점 더 할머니 손과 닮아 간다. 덕분에 나뭇잎을 쓸어 담거나, 나뭇가지를 잘라야 할 때 편리하다. 장미 가시에 찔려도 덜 아프고, 잎에 생긴 작은 벌레도 그냥 손으로 쓸어 내기에도 좋다.


식물을 돌보며


언제부턴가 식물을 돌 볼 때는 안경을 안 쓰는 버릇이 생겼다. 안경을 벗어야 글씨 보기가 더 편해지기 시작했지만, 희미한 눈은 벌레들이 덜 보여 업무 품질 향상에 도움이 된다. 특히 마당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손으로 쓸어 담을 때 맨손과 맨눈이 가장 빠르다. 바깥세상은 실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꿈틀거리기 때문에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면 업무 처리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날 역시 정원의 나무들을 가지 치고, 나뭇잎을 쓸어 담고 있었다. 작은 나뭇잎 부스러기 조차 종량제 봉투에 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작은 조각 하나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느낌이 나뭇잎이 아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던져버렸다. 아. 싫어.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벌레의 사체다. 그걸 맨손으로 집어 든 거다. 그것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리마의 몸뚱이다. 죽어 말라붙은 그리마는 양모와 같은 탄성과 온도가 느껴졌다. 그런데, 내 손의 두터운 군살 덕분인지 생각보다 끔찍하진 않았다.


나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편한 삶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나는 왜 그렇게 아름다운 팔자를 타고나지 못했을까. 그런데, 내가 닮고 싶은 분들은 일상에서 부지런히 수련하고 또 수련하시며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들이셨다. 누가 봐주던 봐주지 않든 간에 어제의 나보다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 어르신들. 나의 솔잎은 일이었다. 일을 할 때 행복하다. 지금까지 못 해 본 일일수록, 처음 도전해 보는 일을 할수록 기분이 좋다.


캐나다 선교사이자 신학박사 및 한국어 학자인 제임스 게일이 쓴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조선말로 노동을 뜻하는 말은 ‘IL’인데, 이 단어는 ‘손실’, ‘손상’, ‘나쁜’, ‘불길한’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 쓴다. 게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가 의심의 여지없이 고대로부터 귀한 신분이라는 것의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귀한 신분이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나는 가만히 있는 건 정말 힘들다. 왼손과 오른손이 다른 일을 할 정도로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짱구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하루를 빼곡하게 일하는 게 재미있다. 아무래도 내 신분은 상민이나 천민인가 본데, 그래도 괜찮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하나씩 더 많아지는 게 신이 난다. 무엇보다 할머니 손처럼 두꺼워지고 있는 내 손은 정말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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