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 년 전 한 사내의 실수 때문에

맷돌 호박 수프

by 주토토

할로윈이 있는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살아생전 맷돌 호박을 손질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건 다 엄마 덕분 혹은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요리왕 비룡으로 키워내듯 매주 화요일마다 집에 들러 각종 식자재를 한 보따리 두고 떠나셨다. 냉이와 달래, 돌나물, 두릅, 죽순처럼 봄날의 새순 채소를 주실 때도 있었고, 더덕과 도라지, 민들레처럼 약재를 대신하는 듯한 채소들도 있었다. 단백질이 풍부한 흰 살 생선과 소고기, 콩도 종종 종류 별로 준비해오셨다. 별다른 설명 없이 갖다 주셔서 별다른 생각 없이 요리해 먹었지만, 나중에 검색해보니 엄마가 주신 식자재들은 모두 산모의 회복에 효능 있는 것들이었다.

엄마가 평소 동의보감을 보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아내의 몸 상태가 많이 회복되었다. 직접 효과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일찍이 엄마가 사다 주셨던 맷돌 호박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이게 뭐냐며 질색하던 나를 무시하고 엄마는 비단 보따리를 맡기듯 맷돌 호박을 나의 주방에 입성시켰다. 다른 것들은 시도라도 해보았지만 맷돌 호박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싱크대 구석에 밀어 넣고 옛 애인처럼 한동안 잊고 지냈다. 하지만 그 크고 둥글둥글한 게 어디 가겠는가. 가슴속 돌덩어리처럼 나를 자꾸만 묵직하게 짓누르던 맷돌 호박을 이제는 꺼낼 때가 되었음을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출산 직후 아내는 몸이 퉁퉁 부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자국이 깊게 패일 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발과 종아리, 허벅지로 이어지는 부분이 심해 급한 대로 유튜브에서 마사지 요령을 터득하여 아침저녁으로 오일 마사지를 해주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그때 소식을 들은 엄마가 직접 갈아서 보낸 것이 맷돌 호박 즙이었다. 호박이 이뇨작용을 도와 부기를 빼는데 탁월하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나는 아내에게 끼니때마다 호박즙을 먹였다.


그런데 맷돌 호박으로 요리를 하려고 검색을 해보니,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산후에 먹는 호박즙이 부기를 빼는데 효과가 없다는 몇몇 한의사들의 의견이 있었다. 부기를 빼주는데 도움이 되는 광물성 약재인 ‘호박(琥珀)’과 이름이 같아서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라고 한다. 책 <자연주의 산후조리>(시공사, 2015)에 따르면, 조선시대 신만이 쓴 <주촌신방>에 ‘호박고’ 처방에 대해 기술한 것이 있는데, 신만이 ‘남과(pumpkin)’라고 써야 할 것을 ‘호박(amber)’이라고 쓰는 바람에 이 오류가 오늘날까지도 잘못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호박이 이뇨작용을 도와 부기를 빼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고통으로 몸이 망가진 상황의 산모에게 이뇨작용을 유발하는 건 신장에 무리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임신으로 생긴 부기는 세포 뇌액이 부은 것이기 때문에 이뇨작용이 아닌 땀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출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본의 아니게 맷돌 호박을 둘러싼 진실공방을 목도하게 되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호박이 부기 제거에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현재로선 둘 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해 보였지만, 일단은 호박즙을 마냥 맹신해선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한편으로 이 사실을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랬다면 출산 직후의 아내에게 호박즙을 주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지금 부엌에서 난장판을 벌이며 호박을 손질하지 않았을 텐데. 뭘 만들어 먹을지 정하진 않았지만, 나는 일단 맷돌 호박 손질을 끝마친 상태였다. 단단하고 둥근 겉껍질을 움직이지 않도록 도마에 딱 대고 칼로 잘라 벗겨내고, 속은 나무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씨를 제거했다(손이 느려서 뒤처리까지 1시간이나 걸렸다).


부기 제거에 효과가 있든 없든, 출산 직후가 아니라면 맷돌 호박 자체가 몸에 나쁜 채소는 아닐 테다. 맷돌 호박에는 체내에서 비타민 A로 전환되는 베타카로틴이 풍부하여 항산화 효과가 있으며, 해독작용이 뛰어나 피부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또한 호박에 함유된 당질은 소화와 흡수력이 높아 위장이 약해진 환자들에게 좋다고 한다(아픈 사람들에게 그래서 호박죽을 쒀주는가 보다). 뭐든 넘쳐서 문제라 생각하며, 기왕 호박을 손질한 거 조금 요리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호박이 그리 예뻐 보일 수 없었다. 맷돌 호박을 수박 썰듯 소분하여 잘랐더니 주황빛이 도는 것이 어쩜 초승달처럼 곱고 예쁘던지, 보는 것만으로 탐스러웠다.


아내는 호박죽보다는 수프가 더 당긴다고 했다. 주문을 받은 요리사처럼 나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요리 유튜버 '국가비' 님의 레시피를 참고하여 내 식대로 차근차근 진행해봤다. 우선 맷돌 호박을 듬성듬성 잘라서 전기밥솥에 넣고 쪘다. 그동안 당근, 양파 한 개씩, 마늘 두 알을 손질했다. 어차피 갈아버릴 것이니 예쁘게 썰 필요 없이 ‘듬성듬성’ 모드로 썰었다.

냄비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과 양파를 먼저 볶았다. 채소에서 수분이 잘 나올 수 있도록 소금 간을 살짝 하고 양파가 투명해지면 당근도 함께 넣고 볶았다. 전기밥솥에서 익은 호박을 꺼내 냄비에 넣고 으깨면서 마찬가지로 계속 볶았다. 불을 약불로 유지하면서 채소가 서로 뒤엉켜 수분이 거의 날아갔다고 생각될 때 즈음에 꿀 한 큰 술과 물을 넣어주었다. 카레를 끓일 때처럼 재료가 모두 잠길 만큼 붓고 중불에서 30분가량 팔팔 끓였다. 무엇을 넣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형체가 뭉개지면 믹서기로 옮겨서 더 곱게 갈아주었다(핸드 믹서가 없어서 고생). 기호에 따라 소금과 후추를 추가하고 계핏가루도 살짝 넣어준 다음, 가가멜처럼 ‘부디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우며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었다.


맷돌 호박 수프를 만드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주방 일이 서툴러서 재료 손질만 1시간, 요리하는데 1시간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결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과 두려움 끝에 한 입 먹어보았는데, 맛이 그럴듯했다. 물론 레스토랑에서 먹는 느낌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폭설 때문에 유럽 깊은 산장에 갇혀 어쩔 수 없이 먹게 된 수프의 느낌이었다.


마꼬를 둘러업고 2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겨우 수프를 영접한 아내는 배고픔에 성이 났지만, 그 배고픔 덕분에 수프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400여 전에 저지른 신만의 실수 덕분에 팔자에 없던 맷돌 호박 수프를 다 끓여보고, 이건 뭐 출세했다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글을 꼼꼼히 안 읽은 분들이 부기 뺀다고 호박 수프를 드시면 안 될 텐데.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호박의 양이 너무 많아서 냉동 보관했다가 그 후에도 두 번 더 호박 수프를 끓여보았는데, 맛있게 먹으려면 두 가지가 더 필요했어요. 꿀을 1 작은술 더 넣어야 하고, 마지막에 생크림을 넣어서 고소함을 배가시켜줘야 해요. 그래야 그 산장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건강하게 먹고 싶다면 넣지 않으셔도 돼요


).



keyword
이전 12화미역국, 네가 아니어도 우린 잘 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