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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Jul 06. 2020

뒤만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태국식 소고기 숙주 볶음

태국식 소스를 곁들인 소고기 숙주 볶음
차돌박이 숙주 볶음


처음 육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공포를 우리 부부도 느꼈다. 아, 아이의 급성장기(원더 윅스)를 말하는 건 아니다. 이건 철저히 부모 개인의 문제다. ‘뱃속’이 문제였다. 심각했다. 마치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 오르페우스의 저주처럼 우리는 뒤만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마꼬는 점점 수유 텀을 늘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몇 끼니를 굶은 사람처럼 자꾸만 냉장고를 파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속이 허해서 두유와 과일을 한 가득 쟁여놓아 보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이쯤 되자 ‘허기’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우리는 뭔가 문제가 생긴 거라고 합리적 추론을 했다. 배에 기생충이 생기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실제로 우리는 무서워서 기생충 약을 사 먹었다).

엄마는 예로부터 먹고 싶을 걸 바로 먹으면 그게 보약이나 진배없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시장에 가기 전, 아내에게 먹고 싶은 걸 꼭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아내는 어김없이 고기라고 답했다. 출산 후 한 달은 아마도 아내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고기를 섭취한 시기였을 것이다. 임신 전에 아내는 페스코 베지터리언이었다. 동물권에 대해 고민하던 아내는 작년 초에 세미 베지터리언인 페스코로 식단을 바꾸었고 나도 얼떨결에 동참하여 집에서는 채식을 하였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자 아내는 고민하지 않고 고기를 먹었다. 뱃속 아이의 신체를 구성할 단백질이 중요하다는 걸 아내는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채식으로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는 분들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로 채식에 대한 공부와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 고기를 먹기로 했다.


보통 소금과 후추 간만 하여 모유수유에 도움이 되는 상추쌈을 싸서 먹곤 했다. 그런데 워낙 육아로 체력이 고갈되다 보니 보통의 1인분 기준인 고기 한 근 갖고는 택도 없었다. 한 번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굽고 각종 야채와 함께 골뱅이 소면까지 한껏 쌓아 올려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건강한 느낌은 아니었다. 전혀 산후조리 식단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성질의 밀가루 소면을 사용한 것도 그랬고(배도 금방 꺼지고), 구운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칼로리를 낮추면서 포만감을 채우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소고기 숙주볶음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숙주는 꽤나 고기와 곁들여 먹기 좋은 식재료였다. 칼로리가 낮아 많이 먹어도 괜찮고, 식이섬유가 높아서 고기와 함께 먹으면 깊은 포만감을 준다. 또한 산모에게 중요한 철분과 칼슘을 포함하고 있어서 빈혈 예방과 뼈 건강에 도움이 된다. 안 먹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이번 요리의 관전 포인트를 아내의 포만감으로 정하였다. 고기만큼 숙주를 많이 넣어서 엄청난 포만감을 선사해주고 싶었다(이런 꿍꿍이를 숨기고 아내에겐 소고기 볶음을 해줄 테니 기대하라고 했다).


소고기 중에서도 귀하고 비싼 부위인 차돌박이와 값싸고 연한 불고기 부위를 사서 숙주와 함께 여러 번 요리해 먹었다. 차돌박이 숙주볶음을 먹을 때는 소금과 후추 간만 하여 고기의 수분이 없어질 때까지 빠른 시간 내에 구웠다. 다듬은 숙주를 마지막에 넣고 숙주에서 수분이 나올 것을 예상하여 다시 한번 소금과 후추 간을 살짝 해줬다. 이대로 먹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숙주를 웍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불을 껐다. 그 누구도 흐물흐물한 숙주를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차돌박이의 얇고 쫄깃한 식감은 숙주와 찰떡이었다. 숙주 특유의 향이 밴 차돌박이는 풍미가 깊어져 더 이상 이 세상 고기가 아니었다. 기름진 차돌박이를 탱탱하고 아삭한 숙주가 감싸 안으며 입 안에서 묘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것은 상추쌈을 해 먹을 때와는 사뭇 다른 전개였다. 상추쌈은 고기와 쌈장과 상추가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각자 흩어지는 느낌인데 반해, 차돌박이 숙주 볶음은 고기의 육즙과 숙주의 달고 시원한 수분이 입 안에서 절묘하게 섞여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완벽하다고 느꼈던 차돌박이 숙주볶음만큼이나 유귀열 요리연구가의 레시피인 태국식 소고기 숙주볶음도 맛있었다. 어떤 면에선 차돌박이 숙주볶음을 능가하는 맛이었다. 고기는 늘 다른 양념 없이 소금, 후추 간만 해서 굽는 게 진리라고 여겼던 아내도 태국식 소고기 숙주 볶음 앞에선 무릎을 꿇었다. 내게도 이 요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 재료를 사용하여 태국식으로 만든 소스에 데친 소고기와 숙주를 버무려 먹는 것인데, 상상 이상으로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무엇보다 <EBS 최고의 요리비법>에서 유귀열 요리연구가가 공개한 소스 맛이 기막혔다. 까나리 액젓 2 큰술, 설탕 2 큰술, 다진 마늘 1 큰술, 다진 토마토 4 큰술, 다진 땅콩 1 큰술, 레몬즙 2 큰술, 홍고추와 청양고추 2 작은술을 넣어 만드는 것인데, 나는 산모가 먹을 것이라서 설탕 대신 매실액을 넣고 청양고추 대신 풋고추를 사용하였다.


한식 재료만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소스에서 태국 음식 특유의 향과 맛이 났다. 피시 소스 대신 까나리 액젓을 사용하여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히려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달콤하고 새콤하고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 잘 어우러져 묘하게 부드럽기까지 했다. 이 소스에 뜨거운 물에 데쳐 기름기를 뺀 소고기와 아삭 거리는 숙주를 버무려서 먹으니, 그것은 생전 처음 먹는 ‘경험’이 되었다.

관전 포인트도 성공이었다. 비슷한 고기 양이라도 물에 데쳐서 칼로리를 줄이고 숙주로 포만감을 높이니, 산모의 산후조리 식사로 아내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나의 꿍꿍이가 제대로 적중했는지 아내는 간식으로 두유나 과일을 찾지 않았다. 대신 엄청난 포만감으로 배가 빵빵해진 우리는 밥을 먹자마자 드러누워 한참을 봄날의 곰처럼 뒹글거려야만 했다.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산후조리 시기엔 기력 보충만큼 그동안 늘었던 체중을 관리해야 한다고 해요. 고기를 먹을 때는 포만감이 높은 채소를 먹는 게 좋겠더라고요. 다만 소개한 숙주는 찬 성질의 식재료라서 몸이 찬 편에 속하는 분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 산후조리 시에는 더욱 조심하셔야 될 테니, 다른 채소를 드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검색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해조류, 브로콜리, 토마토, 단호박, 파프리카, 콩, 버섯, 고구마, 가지, 더덕, 곤드레, 콩나물이 포만감에 좋다고 해요.

-태국식 숙주볶음에는 차돌박이가 아닌 불고기용 소고기를 썼어요. 야채와 같이 먹는 느낌이라서 기름진 차돌박이도 좋지만 담백한 불고기용 소고기도 잘 어울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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