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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Aug 19. 2020

엄마는 이제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스위스식 감자전 뢰스티

비가 와서 전이 당길 때면 아내는 당연한 듯 나를 시켰다. “너네 집에선 내가 만드니까, 오늘은 날 위해서 해줘.” 나는 빚 진 사람처럼 군말 않고 아내의 청을 들어줬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게 있어서인지, 요리 초보임에도 나는 전만큼은 도통하였다. 우리 부부는 주로 김치전, 부추전, 해물파전을 즐겼다. 하지만 내가 진짜 먹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제사상의 전들이었다. 엄마가 해주던 배추전, 깻잎전, 두부전, 동그랑땡, 동태전을 나는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제사와 명절 때마다 시댁에서 전 부치는 것에 이력이 났다. 노동 강도가 높아서가 아니다. 여자들은 좁고 더운 부엌에서 씩씩거리며 노동을 하는데, 남자들은 거실에서 희희 거리며 티비를 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아내는 몇 해 전, 추석특집 <진짜 사나이 300>에서 여자들이 입대하여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비웃던 걸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남자들이 구축한 군대란 세계에 들어가 진흙탕을 뒹굴고 얼차려 받는 여자 연예인들과 가부장제가 만들어놓은 명절과 제사를 위해 남편 집에 들어가 전을 부치는 자신이 오버랩되어 티비 속 그녀들에게 쏟아진 비웃음이 마치 자신에게 퍼부어진 것처럼 씁쓸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페미니즘 운동을 할 때만 해도 아내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가부장제의 부역자'란 소리를 들으며 결혼할 줄도 몰랐을 것이고, 자신의 결혼 상대가 둘째 아들이긴 한데, 형이 미혼이라 자신이 큰 집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결혼해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야 할 줄도 몰랐을 것이고, 평생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명절마다 프라이팬에 그림 같은 전을 부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내의 성향을 알기에 나는 결혼 전부터 제사나 명절이면 부엌에 들어가 잡일을 거들었다. 엄마는 손 필요 없다면서 나가라고 했지만 나는 끈덕지게 부엌에 눌어붙었다. 일종의 밑밥을 깐 것이다. 결혼 후엔 자연스럽게 아내와 함께 나도 일했다. 부엌뿐 아니라 집 청소, 손님 접대까지 하니 어쩌면 내가 더 정신없었다. 하지만 내겐 아무도 그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는 거실에 가서 쉬라고 했다. 아내에게 쉬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느리가 쉴 수 있는 공식적인 이유는 임신밖에 없었다. 마치 전 부치는 것과 아이 낳는 것 외에 다른 삶은 없는 것처럼 아내는 명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아내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명절마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내는 자괴감에 빠졌다.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남편이 있는데, 왜 나는 참을 수가 없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아내는 나 몰래 독립출판물을 내기도 했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글을 모은 건데, 나와 나의 가족에 대해 쓴 책이었다. 나도 한번 보고 싶다고 했지만 아내는 다 팔렸다면서 보여주지 않았다(다 팔리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욕을 썼길래 그랬을까 싶다가도, 그렇게라도 해서 풀린다면 베스트셀러가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다 팔렸으면 좋겠다).

그때의 아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건 한참 후였다. 아내의 책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책의 한 문장 덕분이었다.


남편은 내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한다. 하지만 운을 떼는 건 언제나 나다.

- 에이드리언 리치 <분노와 애정>


지금껏 아내를 따라 페미니스트인 척했지만 나는 세상이 주는 특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내가 명절과 제사 때문에 힘들다고 해도, 그 짐을 함께 드는 걸로 내 몫을 대신했지, 내가 먼저 아내에게 하지 말자고 한 적은 없었다. 결혼 후 아내는 계속 그 짐을 내려놓고 싶어 했지만 나는 구순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바뀌기 어려울 거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6년을 참은 어느 날, 명절을 한 달 앞두고 아내는 공덕역 족발골목에서 소주를 먹다 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차례를 지내러 안 갈 거야.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남자, 여자로 나눠진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지금은 2019년이잖아.”


나는 족발을 먹다 말고 그릇에 공손히 두었다. 당시엔 아이를 가질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때라 나는 아내의 문제 제기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이번부터 안 갈 생각이야?”


아내는 그렇다고 답했고,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다. 아내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이것뿐이라고 했다.


“여자와 남자 같이 음식을 안 하거나, 같이 하거나.”

풀 수 없는 숙제를 받은 나는 몇 날 며칠을 끙끙댔다. 명절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엄마에게 음식을 만들지 말고 이제 그만 사 먹자는 이야기를 숱하게 했다. 하지만 남자 어른들에게 당신들도 주방에서 일해야 한다고 말해본 적은 없었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장남인 형은 제사와 명절을 늘 부담스러워했으나 결정권자는 아니었다. 구순의 할머니는 전혀 돌아설 가능성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전통을 중시하는 분이었다. 키를 쥔 건 엄마였다. 엄마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치 그만 고민하라는 듯 엄마에게서 대뜸 전화가 왔다.

나는 뜸을 들이다가 솔직하게 얘기했다. 우리 부부가 지난 6년 동안 겪었던 고민과 갈등을 처음으로 엄마에게 밝혔다.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는 이 대목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여자 어른과 남자 어른이 모두 음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택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우리가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전통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지금 시대에 맞게 의미를 이어가려는 고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처음에 엄마는 우스워하며 그냥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하니까 엄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면서 길길이 뛰었다. 이 정도로 남자들이 ‘도와주는’ 집이 어딨냐고 했고, 주방이 좁은데 어떻게 음식을 다 같이 하냐면서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 같이 안 하는 방법을 택하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엄마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명절이 끝나면 일주일 내내 아프지 않냐면서 설득하려 했다.

내 얘기를 한참 듣던 엄마는 자신은 괜찮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아직은 팔팔하니 걱정일랑 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너희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줄은 미처 몰랐다면서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시집살이해봤고, 그래서 너희에겐 안 그러려고 하는데, 내가 부족한가 보다.”


나는 엄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엄마는 미안해했다. 고민이 많아진 엄마는 아버지랑 상의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엄마는 아버지와 논의를 마쳤고, 할머니는 본인이 설득하였다고 전화했다. 집안 친척들에겐 할아버지 제사 때 모여 설명하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 그만 집에서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친척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친척들도 그간 며느리들이 너무 고생 많았다면서 엄마의 의견을 따랐다. 다만 가족끼리 모이는 것까지 없앨 순 없으니, 대신 절에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아내의 문제 제기로부터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 내려진 결정이었다. 남자 어른들이 함께 일하는 것은 논의가 되지 않은 한계가 있었지만 가족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다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내의 용기와 엄마의 결단 덕이었다. 우리 부부는 얼떨떨해하며 엄마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담담히 괜찮다고 했다. 25살에 시집와서 미우나 고우나 37년 동안 했던 일을 엄마는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스스로 문 닫았다.

하지만 뒤도 안 돌아볼 것처럼 칼 같던 엄마의 마음은 자꾸만 휘청였다. 엄마는 그 후로도 몇 번 내게 전화 걸어 잘 한 선택인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힘을 실어드렸다. 엄마는 “그렇지? 요즘엔 그렇게도 많이 하니까.”하면서 시원섭섭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곤 했다. 정년 퇴직자의 마음이 꼭 그런 거겠지.




그 후론 제삿밥과 제사 전을 먹을 일이 없었다. 아내의 산후조리 기간 동안 가끔 전이 생각날 때면 우리 부부는 감자전이나 감자채전(뢰스티)을 해 먹었다. 다른 전들은 정제 밀가루를 사용해야 해서 웬만하면 산모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다. 감자전과 감자채전은 감자가 함유한 전분 때문에 밀가루를 넣을 필요가 없는 착한 전이라서 종종 요리했다.

우선 감자를 얇게 채 썬 다음, 파마산 치즈가루를 골고루 뿌렸다. 소금 대신 치즈가루로 간을 해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감자끼리 더 잘 뭉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나선 베이컨을 먼저 바짝 구웠다. 베이컨을 따로 그릇에 담아둔 뒤, 베이컨이 남긴 기름에 채 썬 감자를 누룽지처럼 평평하게 펴서 모양을 잡아주었다.

이제 이때부터가 중요하다. 전을 할 때는 불 세기를 최대로 해야 한다. 전은 기름에 굽는 게 아니라 튀기듯 조리해야 맛있다. 중불로 천천히 구우면 기름이 전에 스며들어서 눅눅하고 기름지기 십상이다. 그에 반해, 강불에서 튀기듯 빨리 조리하면 전이 튀김처럼 바삭해진다. 기름이 타서 연기가 나지 않도록 불 조절에 주의를 기울이며 감자채전을 앞뒤로 바삭하게 부쳤다. 같은 팬에 계란 프라이를 한 다음, 감자채전 위에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예쁘게 올렸다. 여기에 치즈가루를 한번 더 뿌려주면 스위스식 감자전인 뢰스티 완성이다.

우리 부부는 감자전의 쫄깃함만큼이나 감자채전의 바삭함을 사랑했다. 감자채전만 먹어도 이미 맛있는데, 베이컨의 짭조름함과 치즈의 감칠맛, 계란의 고소함까지 더해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조상이 스위스인이 아니고선 제사상에 올라갈 리 없는 뢰스티를 먹으며 나는 우리를(정확히는 아내를) 괴롭혔던 그 모든 것들로부터 완벽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곤 했다.

가끔씩 생각한다. 그 경험이 엄마에게는 어떻게 남았을까.

가부장제가 불편하고 제사와 명절이 여자들을 착취하는 구조가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가 정성껏 부쳐준 전을 사랑했다. 소고기 뭇국과 삼색나물, 닭백숙과 조기구이, 산적 등 엄마가 해준 음식을 나는 잘도 받아먹으며 자랐다. 그러니 엄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엄마와 아내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다. 엄마는 이제 명절에 가끔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내가 배추전과 동태전이 아닌 뢰스티를 먹는 것처럼.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저는 감자볶음 할 때처럼 감자를 채 썬 다음, 물에 씻거나 담가 둔 적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감자의 전분이 씻겨서 나중에 전 부칠 때 모양을 만들기가 어렵더라고요. 감자채전은 채 썬 감자를 물에 씻지 않고 조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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