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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쓰기 DNA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by 박민우

1. 늦게 배운 한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한글을 깨쳤어요. 그 전엔 까막눈이었죠. 어머니가 계몽사에서 나온 책들을 읽어 주셨어요. 괴도 루팡이나 위인전 같은 거요. 한글을 알았다면, 자발적으로 읽을 리 없는 책들이었죠. 한글을 모르니, 어머니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빨려 들어갈 것처럼 흥미진진하더라고요. 제발 책 좀 읽어달라고 자주 어머니를 졸랐어요. 그 어떤 영화보다 생생했으니까요.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소리글'의 재미를 몰랐다면 이야기의 세계에 큰 매력을 못 느꼈을 거예요. 글자가 아닌, 어머니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가상의 세계가 저에겐 말도 못 하게 구체적이었어요. 나도 언젠가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봐야지. 그런 꿈을 갖기 시작했죠.


2. 친구가 없었어요


또래에게 인기가 많았다면, 공상에 빠지지 않았을 거예요. 도대체 저는 왜 또래들이 싫어하는 아이였던 걸까요? 집 밖으로 나가도 낙이 있어야 말이죠. 형이 친구들이랑 사라지면, 시멘트로 생긴 쓰레기통 있잖아요. 집집마다 하나씩 붙박이로 있던 쓰레기통이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저만의 세상으로 놀러 다녔어요. 내가 동네에서 제일 인기도 많고, 잘 생겼고, 부자다. 모두 내게 굽실거리고, 나는 그 거지 같은 놈들에게 백 원씩 나눠 준다. 딱지를 주거나, 구슬도 준다. 이런 상상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재미났어요. 왜 굳이 쓰레기통이었냐면, 저를 조금은 가려야 해서요. 아예 멀리 갈 용기까지는 또 없고요. 방에서는 개나리 벽지의 반복되는 패턴을 보면서, 상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어요. 벽지 무늬를 오래 보면 흐물흐물해지면서, 이상한 나라의 폴(시간 여행하는 만화)처럼 4차원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었어요. 모르셨죠?


3. 무지개 마을의 환상적인 부록, 마이크


무지개 마을이라는 전집을 학교에서 팔았어요. 책을 파는 사람이 학교 교실에 들어와서 영업을 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내막이야 제가 어찌 알겠어요? 그런데 부록으로 마이크를 주는 거예요. 라디오처럼 생긴 단말기에 마이크가 연결되어 있었어요. 한 손으로는 본체를, 한 손으로는 마이크를 들고 동네에서 쩌렁쩌렁 마이크 테스트를 할 수 있었죠.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사금 팔아요. 고장 난 시계, 테레비 삽니다. 메밀묵, 찹쌀떡. 온갖 잡상인 성대 묘사를 할 수 있었죠. 이 얼마나 환상적인 놀이 기구인가요? 이틀 밤낮을 졸랐어요. 결국 책을 주문해 주셨는데, 제가 마이크에 환장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 혼났어요. 책은 핑계였다는 걸, 어머니가 눈치 채신 거죠. 무지개 마을이 아마 MBC 라디오에서 했던 동화를 추려서 낸 책이었을 거예요. 마이크가 시들해질 때쯤, 그 책들을 한 권씩 읽었어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상으로 재밌는 얘기들 뿐이었죠. 마이크보다 훨씬 더 재미난 이야기 세상이 거기에 있더라고요. 그때 저의 판단은 옳았어요. 마이크에 잘 낚인 거죠.


4. 한 학년에 한두 명씩은 있었던 글 천재들


중학교 때 학교 교지 편집 위원을 했어요. 지원을 했던 것 같아요. 방학 때도 학교에 가야 했는데,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하더라고요.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술'이었어요. 중2병의 얼치기 어른 흉내였던 거죠. '인생은 빈 술잔'으로 시작하는 시들이 너무너무 많았어요. 뻔한 개수작이 난립하는 가운데, 간결하고, 기발한 글이 툭툭 튀어나오더라고요. 잘 쓴 글을 볼 때마다 왜 그렇게 화가 나던지요. 네가 뭔데, 나보다 더 뛰어난 거야? 고등학교 때 이지건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이미 기성 만화가들의 스토리 작가를 하고 있었어요. 고등학생 신분으로요. 놀랍지 않나요? 시면 시, 수필이면 수필. 썼다 하면 장원인 거예요. 지금도 만화 스토리 작가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고등학생 때 보여줬던 만화 시놉시스가 지금도 생생해요. 제목은 코스모스였어요. 미래를 구원하는 다섯 명의 영웅 이야기였죠. 그중 한 아이는 달라이 라마였어요. 장소는 티베트. 달라이 라마가 죽고,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기 시작해요. 그때 한 꼬마 아이가 구슬 놀이를 해요. 구슬은 손에 닿지 않고 공중으로 떠올라요. 이 아이가 달라이 라마다. 사람들이 엎드려요.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래요. 고등학생이 이미 완성된 세계관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더라고요. 저보다 뛰어난 아이들은 다 개자식이에요. 너무 잘 나서 재수 없는 자식들. 그런 아이들의 글들을 보면서, 승부욕을 불태웠어요.


5. 타고난 말발


타고났다는 말은 웬만한 용기 없이 쓸 수 없는 말인 거 알아요. 타고난 거 같아요. 일단 집안사람들 중에 말 잘하는 사람이 많아요. 내가 더 말 많이 할 거야. 내가 더 웃길 거야. 이런 신경전이 느껴진달까요? 상대적으로 저는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남자 형제들 중에는 가장 어렸으니까요. 또래들 사이로 들어갔더니, 제가 대단한 달변가더라고요. 5 분단 맨 끝에서 이야기를 하면, 4 분단 맨 앞에 있는 아이까지 귀를 쫑긋 세웠어요. 말대꾸를 잘해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맞았어요. 그런데도 어른들에게 대들었어요. 제 눈엔, 어른들이 틀렸으니까요. 여행 다니면서 영어로 더듬더듬 이야기할 때조차, 밤새 나불대는 능력이 제겐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어로 유머도 창작해냈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고기는? What's the most yummy fish? 정답은 Selfish. 네, 아재 개그 맞아요. 미국 친구 로렌이 생각할수록 웃기대요. 남자 친구가 저를 너무 보고 싶어한대요. 이런 거룩한 유머를 창작해낸 자가 누구냐면서요. 믿거나, 말거나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글을 쓸 때마다 느껴요. 나는 생각보다 위대하다. 그런 생각도 가끔 들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죠. 그냥 '하는 인간' '쓰는 인간'이면 족해요. 현재 진행형으로 살고 싶습니다. 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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