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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an 23. 2021

이슬아 작가가 누구야? 꼰대작가는 젊은 작가가 불편해요

나의 불쌍하고, 한심한 열등감에 대하여


이슬아 작가가 몇 살이지? 92년 생이더라고요. 저보다 딱 열아홉 살이 어리네요. 저는 이슬아 작가 덕을 봤어요. 구독 서비스라는 게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이슬아 작가는 구독료를 받고, 자신의 글을 발송하는 일을 최초로 시작해요. 용감한 젊은 작가 덕에, 저도 시도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거죠.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요. 글은 제가 먼저 썼어요. 글 선배로 자부심 좀 느끼면 안 되나요? 글도 다 연륜이죠. 젊은 친구가 쓰면 얼마나 잘 쓰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이슬아 작가만 찾더군요. 검색을 해봤더니 한 달 수익이 천만 원 대래요. 저는 구독 서비스로 한 달에 백만 원 조금 넘게 벌거든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요. 이슬아 작가가 단행본으로 묶은 책들은 베스트셀러더라고요. 이게 말이 되냐고요? 제 책이 인생 책이라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 갔나요? 제가 누군가요? 저, 박민우라고요. 진짜 창피해서, 글 놓고 싶어요. 비슷한 연배거나, 나이 많은 거장들에게만 지고 싶어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작가에게, 이런 모멸감을 느껴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저는 평생 샘을 내며 살았어요. 티를 내면 안 되죠. 거룩해야 마땅한 작가(이럴 때는 글쟁이 아님)니까요. 박준 작가의 '온 더 로드', 알렝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가 대박이 났을 때도, 태원준 작가의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가 장안의 화제가 됐을 때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요. 내가 이들보다 못한 게 도대체 뭐야?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저를 몰라줘도 너무들 몰라 주는군요. 판매 부수는 성적표 아니겠어요? 인세로 1년에 백만 원 조금 넘게 버는 박민우는 퇴출 1호 작가인 거죠. 샘을 내는 것도 사실은 사치죠. 비슷해야 샘도 내는 거죠. 태원준 작가는, 작가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예요. 제 책을 얼마나 응원해 줬는데요. 어머니도 그렇게 제 책을 좋아해 주셨죠. 그래도 질투심 앞에서는 쉽게 배은망덕해지더라고요. 속으로만 생각했으니, 배은망덕까지는 아닌가요?


글은 에너지죠. 이슬아 작가가 세상이 더 원하는 작가인 거죠. 그들에게 필요한 글을,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글을 써내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녀의 아픔과 외로움의 골이 깊으니, 공감의 능력도 남다르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슬아 작가의 글을 안 보는 건, 겁나서예요. 진짜로 잘 쓴 글을 보는 게 두려워서죠. 보셨죠? 이제 아셨죠? 왜 작가들이 자신의 젊을 때 글을 못 넘어서는지 아시겠죠? 옛날의 감옥에 갇혀서, 라테 놀이를 해요. 그때 받았던 환호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반성과 도전은 없고, 몇 번을 우려먹은 빈껍데기 티백만 잔에 말라 붙어 있어요. 그게 늙은 작가의 실체예요.


저는 제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왕이면 오래 보고 싶어요. 천천히요. 아무도 관심 없어요. 나를 이슬아 작가와 비교하면서 흥미진진해하는 이는 지구에 단 한 명도 없죠. 자격지심이 이렇게나 무서워요. 질투로 세상의 프레임을 내 안으로 욱여넣어요. 욱여넣은 세상이 진짜라고, 전부라고 개처럼 짖어대죠. 세상은 평온하고, 혼자 광견병에 걸려서는 침을 흘려요.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흉측한데도, 자신만 모르죠. 저는 왜 이런 글까지 쓰고 있을까요? 귓불이 빨개져서는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희망의 불씨를 봐요. 혹시 다시 젊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간절함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내가 이슬아 작가에게 도전해야죠. 나보다 열아홉 살 어린 작가보다, 더 잘 쓰고 싶고, 더 뜨거운 글로 다가가고 싶어요. 애를 써봐야죠. 불가능하게 느껴져요. 못해낼 것 같아요. 차라리 과거의 거장들과 싸워보라고 하면, 싸워보겠어요. 그만큼 세월로 굳어진 순발력과 사고가 치명적이라는 거죠. 하지만 젊음이 뭔가요? 막막한 사막에서, 별 하나에 의지해서 길을 찾는 여정 아닐까요? 죽기 아니면 살기. 어차피 걸을 수밖에 없다면, 죽을 때까지 걸어보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면 노인, 끝내 걷기를 택하면 젊음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또 씁니다. 막막해질수록, 두려울수록, 해낼 수 없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저는 젊어지고 있습니다. 치부를 드러내는 글은 쓰기 참 싫어요. 그런데 또 어찌나 그렇게 잘 써지는지 모르겠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지질한 글쟁이의 부끄러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공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도 약하고, 외롭습니다. 조금은 부족해도 된다. 그런 위로가, 제 글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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