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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Apr 06. 2019

나는 죽는다.  그러니까 황홀

카레와 여행으로 끓는 통영의 밤


일기를 쓰고 싶기도, 쓰기 싫기도 하다.


많은 일들이 일어난 날. 일기다. 흥행까지 생각한다. 아무래도 나만 보는 일기가 아니니까.


1


"똑똑똑!"


문을 두드린다. 처음 있는 일이다. 급하게 바지를 입고, 문을 연다. 서 PD, 김 PD다. 손에는 카누 텀블러가 있다. 카누 사면 주는 공짜 텀블러. 텀블러에 커피가 흘렀다. 공짜라서 새는 텀블러. 아침에, 왜, 커피? 눈 뜨자마자 마신 커피가 공복 위장에 가득하다. 고구마와 퀘이커 오트밀까지. 따듯한 순간이다. 늙고 존경받는 작가인가 봐. 나는 나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별 다섯 커피가 담겨있다. 온순한 향이 사무실을 휘덮었더랬지. 뭉게구름 같은 커피라서, 갸우뚱. 고구마가, 정성껏 내린 커피가 뒤늦게 뭉클하다. 텀블러 뚜껑을 열자마자 찌푸려진다. 바로 내리고, 바로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 향이 찌그러졌다. 마이너스 10점을 깔고 가는 커피. 마이너스 10점은 마시자마자 극복된다. 아프리카 특유의 고구마  향이 아래로 깔리고, 산미가 잔잔하게 치고 온다. 케냐에서 온 커피가 통영의 숲에서 작게 요동친다. 무작정 달려드는 커피가 아니라, 돌아올 줄 알고, 묵묵히 쓸고, 닦은 커피다. 나는 누군가가 자신감을 가지고 보내온 커피에, 맞장구를 쳐줄 마음이 없다. 이미 잘난 걸 자기네도 알 테니까. 별 다섯 카페 사장은 사람을 잘 봤다. 좋으면, 못 참고, 마음껏 호들갑 떠는 게 또 나니까. 텀블러에 담겨서 첫 1분을 놓친 커피가, 내 커피 인생을 휘젓는다. 이 커피는 세상을 뒤집어놔야 한다. 누구나 마시는 커피가 되면, 그때 나는 안 마시겠다. 심통으로 덜 알려진 커피를 찾겠다. 삶에 적절한 재미를 찾는 이들은, 용인 고기리 별 다섯 카페로 갈 것. 내 호들갑을 의심하며 케냐 커피를 찾을 것. 후각이 둔한 이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추천. 차가울수록 혀에 닿는 향을 예리하게 낚아챌 수 있다.


2


닭 일곱 마리를 우유에 재고, 감자 껍질을 까고, 양파를 썬다. 카레 40인 분. 초대형 냄비에 코코넛 밀크를 조린다. 수분이 증발하며 고소함이 진동한다. 닭 일곱 마리를 찬물에 헹구고, 냄비로 쏟는다. 마사만 카레 페이스트 500g을 넣고 볶는다. 불안하지 않다. 맛을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 혀가 노화하면 사라질 능력이다. 서 PD, 김 PD가 감자 껍질을 벗기고, 양파를 썰었다. 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초대형 팬이어서, 화력 끝내주는 가스 불이어서 허무하게 수월했다. 완벽한 마사만 카레. 전 세계인들이 가장 맛있어하는 요리. 내 자신감이 지나쳐서 좀 걱정됐는데, 모든 변수를 제압할 정도로 안정적인 요리사가 됐다. 지금의 나라면 맛없게 만드는 게 훨씬 더 어렵다.


"어머 살이  빠지셨네요?"


창원에서 찾아주신 오랜 독자가 제일 먼저 입장. 참외와 딸기가 가득한 봉지를 내민다. 감사함보다는, 내 얼굴 상태부터 실감한다. 카레와 여행의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세수하고, 면도하고 나름 노력해도 노화로 빠져나간 지방은 어쩔 수 없다. 살이 빠졌다는 소리를 늘 듣는다. 얼굴 지방이 사라지면, 배에 지방이 아무리 쌓여도, 앙상하다. 몰골이 비루하다. 내가 관찰되는 시간. 이런 날 나의 노화는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오랜 벗들에게도 연락이 뜸한 이유다. 한때 나는 내 나이로 보이는 얼굴을 간절히 원했다. 너무 어리게만 보여서 불편했다. 드디어 소원을 이뤘고, 나는 숨고 싶다. 나의 바람이, 저주가 됐다. 불로 지진 듯 뜨거워서, 펄쩍 뛴다. 인간은 늘 자신이 싫다. 이런저런 핑계로 부정한다. 헛된 자아가, 혹은 욕심이 목을 조른다. 십 년 후에, 이토록 젊은 얼굴이? 나는 더 늙어서는, 오늘의 나를 의아해할 것이다.


올까 말까 했던 행정실 직원이 마사만 카레를 네 그릇이나 먹었다. 내 여행 이야기에 눈물이 날 뻔했다고도 했다. 내가 갑자기 잘 생겨 보이기까지 한다고 했다. 오래 떠돈 사람. 나 말고도 많다. 누군가에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늘 의심한다. 의심은 곧 힘을 잃는다. 우리는 마주하고 있으니, 말하고, 듣는다. 내 여행과 누군가의 여행, 태국에서 날아온 근사한 카레가 있다. RCE 세자트라 숲 직원들. 참석한 이들을 챙기고, 장비를 챙기는 이들이 초롱초롱 나를 듣는다. 바쁘고, 정신없지만 내 이야기에 빨려 든다. 완벽한 집중은 나를 어떤 지점으로 데려놓는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도 된다. 자유로워져서, 내 안을 쏟는다. 불안해지세요. 불안에 감사하세요. 불안을 힘으로, 여행하세요. 뒷맛 깨끗한 쾌락, 여행을 탐하세요. 지껄임과 깨달음. 애매한 지점에서 마음껏 논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말도, 그냥 한다. 내가 하는 이야기지만, 아니기도 하다. 밤의 통영, 주택가를 벗어나 깊이 들어온 숲, 그곳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온 사람들. 어딘가 떠나고 싶고, 그냥 카레맛이 궁금하고, 아무 말이라도 듣고 싶다. 각자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는 카레를 먹는다. 마흔일곱의 남자를 듣는다. 내가 닿지 않는 곳까지 다 쏟고, 나는, 내 방으로 숨는다. 결과는 모두가 원한만큼, 그 이상이 됐다. 내 안은 여전히 들썩들썩. 빨리 숨고만 싶다. 흥분한 채로, 엄청난 양의 도시락을 입에 구겨 넣는다. 배는 안 고픈데, 먹는다.


나는 죽는다.


나는 이 말에 늘 위로받는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도, 위로가 필요하다. 나의 늙음이나, 나의 추함도 죽는 시간에 놓여있으니, 됐다. 영원하지 않을 테니, 발버둥도 그때까지만. 꽉 채워진 위장은 불편하지만, 어쨌든 나는 죽는다. 그 순간은 두렵지만, 꼭 와야 한다. 저주로서의 죽음이 아닌, 순리로서의 죽음. 모두에게 정해진 수명 끝의 거룩한 단계. 나는 감사한다.


나는 부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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