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땡이를 허하소서
아, 도저히 쓸 수가 없다!
더러운 책상이 남의 것이로군요.
난 이런 적 없어요.
곧 제자리에 놓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마음껏 '거기다' 두나 봐요.
내 안의 미친놈이요.
아, 정신사 나워요.
글을 쓸 수가 있어야 말이죠.
어머니는 어쩌자고 제 방에 빨래를 하나씩 너시는 걸까요?
생활비 한 푼 안 보태는 아들은 탈수기까지 안 쓰는 어머니를 일부러 모른 척합니다.
정리된 고요함을 원해요.
바이올린 현처럼 탄탄한 고요를 타고
내 글은 미끄러져야 해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될 거예요.
느슨해진 현을 팽팽하게 말아 올린
그런 시공간을 원해요.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와요.
집 앞에 청소년 수련관이 생겼어요.
건너편에는 GS25가 있죠.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1,200원.
청소년 수련관은 어찌나 관대한지, 30년 전 청소년도 안 쫓아내요.
수련관에는 카페라는 공간이 있는데, 이름만 카페죠.
커피 안 팔아요.
청소년들은 컵라면 먹고요.
초딩은 컴퓨터 게임을 해요.
어머니들은 왜 내 아이가 그 아이에게 맞았는지
폭력적인 아이가 친구가 없는 이유를 분석하고요.
들어갈까?
이제 여덟 시예요.
공공기관이 여덟 시에 열 리가 없죠.
아이들이 내 옆에서 왕뚜껑을 먹는 것도 싫어요.
냄새가 너무 좋아요.
일요일 아침, 라면만 먹어도 끄떡없는 건 청소년이라서예요.
늙은 위장은 라면이 버거워요.
자, 그럼 저의 주거래 카페 이디야로 갈까요?
이디야는 저평가된 카페예요.
호주 멜버른 최고의 카페와 겨뤄볼 만하죠.
이디야 덕에 읍면 단위의 어르신까지
아메리카노하게 아침을 시작하게 됐어요.
경의를 표합니다
만
아메리카노가 3,200원으로 올랐어요.
2,800원이었거든요.
정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커피니까요.
제 상황이 정당하지 않아요.
저의 아침은 2,000원을 넘기지 않았으면 해요.
건너편 다이소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아른거리는군요.
빽다방도 지나쳐요.
앉아있을 수가 없잖아요.
빽다방 가면 달달한 거 시키게 돼요.
너무 맛있어요.
새로 연 무인카페로 갑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 저를 도둑으로 몰았던 카페 아니에요.
거긴 다시 안 가요.
웃기죠?
화가 나서 안 간다기보다는
이상하게 겁이 나요.
나를 기억하고
너, 그때 커피도 안 시켰지?
거지 손님으로 기억할까 봐요. '
저, 그때 커피 두 잔 마셨어요.
텀블러에 마셔서 오해하신 거예요.
왜 안 따지냐고요?
바이올린의 팽팽한 고요를 원하니까요.
어이쿠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오해했군요.
죄를 인정한 주인과 한 공간에서
새롭게 서먹해지고 싶지 않아요.
무인카페지만 이상하게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요.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 무인카페가 또 생겼어요.
인건비가 안 드니까요.
무인카페가 여기저기 생기고 있어요.
슬픈 일이죠.
일자리가 줄고 있어요.
대신 저에겐 1,500원 아메리카노가 있죠.
세상이 각박해졌어요.
저는 약간의 혜택을 받았죠.
알바를 못 찾아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들이 멀리멀리 남 일이 되죠.
여덟 시면 아무도 없어야 해요.
몇 번 와봤어요. 아홉 시에도 저뿐이었어요.
일요일 여덟 시에 카페부터 찾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누군가가 있어요. 누굴까요?
아, 또 주인이군요.
주인 부부로군요.
왜 무인카페가 무인이 아닌가요?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우주의 끝이라든지, 영혼의 떨림을
왜 저는 봐야만 하는 걸까요?
물청소를 하고 있어요.
들어와서야 알았죠.
제 신발 바닥이 흙길을 다녀온 걸 미안해해야 할까요?
발자국이 또렷또렷 땟국물을 눈치 봐야 하는 거예요?
굳이 내가 앉아 있는데, 내 발 근처까지 싹싹 닦는 주인을 미워해야 할까요?
아, 정말 이런 내가 싫긴 한데
일부러 신발 밑을 하늘로 향하고
일종의 양반다리로 의자에서 오다리를 만들어요.
바닥에 발 대지 않겠습니다.
물이 다 마를 때까지요.
항복 선언을 해버려요.
주인에게 항복하는 고양이가 돼버리죠.
아내분이 나갈 때 끄덕 눈인사를 해줬어요.
나는 약간은 반가운 손님이겠죠?
여보, 이 시간부터 손님이 와!
애들 학원비는 나오겠지?
크지 않은 꿈인데
꼭 이룰 수 있는 꿈이 되어
부부의 아침은 한결 상쾌하지 않을까요?
드디어 혼자예요.
모든 존재가 제 글을 허락하는군요.
쇼팽의 피아노곡이 흐르고요.
쌀쌀하지만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아늑한 공간에서
UCC coffee 아메리카노를 뽑습니다.
기계 커피에서 화려한 향이 넘쳐요.
기계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될까 봐 겁이 나는군요.
아, 좋네요.
글을 쓰기 좋은 시간은
글을 안 쓰기에도 좋죠.
제 안의 다짐을 어길까 봐요.
어떻게든 되겠지.
일요일이잖아요.
모든 게으름이 허락된 일요일 아침이잖아요.
날름, 한 모금 먼저 할게요.
제가 이룬 작은 성과로군요.
팽팽한 고요가, 이토록 완벽하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