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단식 후 폭식

맛있으면 0칼로리

by 박민우

22시간을 굶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됐어요.

드디어 점심을 먹는군요.

마라톤 같은 22시간이었죠.

42.195km 같은 시간


반찬과 밥을 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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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식은 안돼요.


텅 빈 속을 천천히 채워야죠.

자제력이 한껏 반영된 양 아닌가요?

어쩌면 이렇게 어른스럽게 늙어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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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RCE 세자트라 숲


지속 가능한 공존을 가르치는 멋진 학교

학교지만, 딱딱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있는 문턱 낮은 학교

스무 명의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점심은요.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해

맛있는 밥이 먼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곳이더군요.


양념 오차 범위 1g의 초정밀 소불고기가 제일 처음 등장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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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막지하게 오래 조려야 해서

제가 한 번 해 먹고

두 번은 못 만들겠던 아삭 연근 조림도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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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저리형 김치라고나 할까요?


세상이 저염식이 되고

저도 음식 짜면 인상부터 써요.

이 짭짤한 김치를 입에 넣는 순간

그동안의 금욕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자기주장이 뚜렷한 김치로군요.

철학이 있다면, 우린 그 철학을 이해할 책임이 있죠.

찬물에 밥 말아서 요거, 요거 하나만 곁에 두고 오물오물


그런 여름이 기다려져요.

요것 때문에요.


이 글을 쓰면서 또 침이 고이네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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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 20분 걸었더니요.


이순신 공원이 짠!


놀라우시죠? 네, 저도 놀랐어요.

통영에 섬이 많잖아요.

섬 여행을 가야 하는데요.

이 풍경에 귀찮아졌어요.

어떤 섬을 간들

이보다 대단하겠어?


넋 놓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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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정도를 더 걸으면요.

통영 시내가 나와요.

통영이 작더라고요.

버스 안 타고도, 웬만한 곳을 다 갈 수 있어요.


거북당 꿀빵


인스타그램(www.instagram.com/modiano99)에서 추천했던 꿀빵이로군요.

거북선 꿀빵이라 했지만

거북당이겠죠?

꿀빵 업계에도 상도의가 있을 텐데요.

너는 거북선 해라

나는 거북당 할게.


이럴 리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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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후에 폭식은 안돼요.


제 몸으로 깨달은 몸 지식입니다.


천천히, 좋은 음식 먹어야죠.

먹을 때 실컷 먹는 게 간헐적 단식인디?

TV에서도 그렇게 나왔고요.


제 몸은 안 그렇더라고요.


먹을 때도, 조심조심 정량을 먹어야 해요.


안 그러면 탈이 나더라고요.

속이 부대끼더라고요.


그렇다고 통영 와서 꿀빵 안 먹을 수 없으니까요.


두 개만 먹겠습니다.

제가 정한 정량입니다.


두 개를 먹습니다.


커피가 남았어요.


아니, 저, 욕하지 마시고요.

꿀빵이 네 개 남았고, 아메리카노도 절반 남았어요.

그냥 커피만 마셔요?

꿀빵이 네 개인데요?


그래서 두 개 더 먹습니다.


결말은 다들 아시죠?

그래요.

두 개 남겨서 뭐 하게요?

엄청 끈적거려요.

가방 안에서 튀어나오면요.

가방 빨아야 해요.

카메라에라도 묻어봐요.

카메라도 날아가는 겁니다.


먹었죠.

끝냈죠.

끝내야죠.


집으로 갑니다.


세자트라 숲이 제 집입니다.

당분간은요.


걸어오다가요.


휘청


걸으면서 졸았어요.

공복 22시간

든든한 꿀점심

꿀빵 여섯 개

식곤증 폭탄이 옵니다.

내 몸 리서치 연구 결과입니다.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했어 봐요.


가끔은 그런 사고가 반가워요.

재미있는 일기가 될 테니까요.

아뇨.

이젠 안 그래요.

그깟 재미, 소중한 제 몸이 먼저죠.


전 넘어지지 않았고

무릎 까지지 않았고

휘청한 덕에 정신이 돌아옵니다.


집 앞 풍경이에요.


천국이네요.

식곤증으로 몽롱함까지 겹쳐서는요.

사후 세계의 풍경 같아요.

착한 사람만 올 수 있는 천국요.

꿀빵을 24시간 내내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먹는 그런 천국요.


굶자!


굶고 꿀점심 먹자.

22시간 또 비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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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부 작가님 일기 봤잖아요. 오늘 저녁밥이에요."


세자트라 숲 서 PD가 이렇게 예쁜 도시락을 건넵니다.

제가 연재한 일기를 봤다면서요.

귤까지 챙겨주시더라고요.


큰일 났습니다.

이건 절대 못 먹습니다.

밥 양을 보세요.

이런 밥은 중학생 때나 가능했죠.

절반은 버려야 해요.

어디에 버려야 할까요?

쓰레기는 극도로 제한하는 곳이라서요.

음식물 쓰레기통은 없어요.

변기에 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땅을 팔까요?

문밖에 놔두면 멧돼지가 처리할까요(실제로 멧돼지 출현한답니다)?


이거 다 먹으면 탈 납니다.

분명해요.


어쩌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입에 버렸죠.

제 입에 다 버리고, 입술로 밀봉 처리했습니다.


아니, 이 귀한 음식을 진짜 버릴 거라 생각하셨나요?


단식이고 뭐고, 이리 맛있는 음식은 먹는 겁니다.

생은 짧고, 쾌락은 더 짧죠.

먹고, 죽어야죠.

죽지 않더군요.


점심과 정확히 일치하는 저녁밥이지만 더 맛나요.

고기가 알아서 자연 숙성되고

오징어 젓도 그새 1% 더 양념양념해졌어요.

아름다운 숲에 감싸여서

이런 혼밥을 하다뇨.


정신이 혼미합니다.

세상 쾌락은 역시 먹는 거였어요.

이 쾌락을 제가 거부할 수 있을까요?


거부하겠습니다.


내일은 회식이 있다니까요.

회식 때까지 굶습니다.

다시 스물두 시간


굶어보겠습니다.


통영 일기가, 어쩌다가 단식 일기가 됐을까요?


벚꽃이 망울망울 터지고 있어요.

여러분 어서어서 오세요.

안 착한 사람도 오세요.

벚꽃 천국이 다 받아준답니다.

와서 착해지세요.


아, RCE 세자트라 숲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네요.

저라면 당장 응모하겠어요.

꿈의 직장이라니까요.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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