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인 기억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유쾌하지 않은 기억에서 자유롭고 싶어요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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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학로에서였어요. 짙은 갈색 반코트를 입고 갔어요. 허리끈으로 조이는, 저에겐 특별한 옷이었죠. 이대 의대생이랑 소개팅이 있었거든요. 과 친구가 꼭 만나야 된다고 하도 성화여서요.


-미안, 이삿짐을 옮겨야 하는데, 깜빡하고.


이십 분이나 얘기를 나눴을까요? 이사를 핑계로 가버리더군요. 정말 성의 없는 핑계 아닌가요? 내가 소개해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고, 꼭 좀 만나보라고 해서 나갔더니, 대차게 까이게 만들어요? 그래, 나도 너 별로였다. 이 말을 못 해준 게 그렇게 분하더군요. 진짜 별로여서라기보다는, 너도 상처 좀 느껴 봐. 그런 뒤끝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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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제가 사회까지 본 날이었어요. 친구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뷔페에서 한 접시를 끝냈죠.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렇게 출입을 관리할 거면, 화장실을 안에다가 만들던가요. 규모도 큰 웨딩홀에서 갑자기 사람 하나를 거지 취급하더군요. 여직원, 남직원 쌍으로 입장 불가를 외치면서 꺼지라는 거예요. 양복까지 갖춰 입은 저에겐 가장 멋진 모습조차 거지처럼 보였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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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런 애를 재워 주고 싶겠어?


시리아 알레포에서였어요. 카우치 서핑이라고 아시나요? 공짜로 잠을 재워주는 사이트예요. 빈 방이 있으면 빈방으로, 소파가 남으면 소파에서 재워주는 식이죠. 재워줄 수는 없지만 같이 밥을 먹자더군요. 재워줄 수 없는 이유는 폴란드(였을 거예요)에서 온 두 아가씨 때문이라고 했어요. 저보다 하루 먼저 방을 차지한 두 아가씨도 같이 나왔더군요. 남자는 비웃는 표정으로 그렇게 저에게 엿을 먹이더군요. 설령 제가 거지처럼 보인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굴욕적인 순간들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생각날 때마다, 기분 더러워져요. 다 지난 일이지만,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 화가 나요. 그만큼 아팠다는 거니까요. 스무 살 미팅에서 까인 거야, 그냥 좀 웃긴 정도라지만 결혼식장이나 시리아 일은 지금도 울컥해요. 왜 그때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주지 못했을까? 겁나서 못 하겠더라고요.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개무시당했음을 재인증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 더 화가 나나 봐요. 그냥 당하고만 있어서요. 듣고만 있어서요. 풀지 못한 응어리가 상처가 됐나 봐요. 이런 굴욕감은 발작과 비슷해요. 불쑥 찾아오고, 불쑥 사라져요. 그럴 때마다 자존감은 와르르 무너지죠.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어떻게든 부인하고 싶어서, 더 괴로운 거죠. 그럴 리가 없다. 내가 거지처럼 보일 리가 없다. 아무리 부정해도, 굴욕은 사라지지 않아요. 누군가에겐 거지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지. 엄연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문제가 해결되죠. 쉽지 않아요. 쉽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타인의 시선을 무슨 수로 교정하나요? 더 잘 생겨지면, 더 비싼 옷을 입으면 해결될 문제겠죠. 그렇다고 모든 이의 경멸을 완벽하게 박멸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가 잔인해요. 언제나 등급이 있죠. 키와 몸무게로도 계급을 나누죠. 모든 게 상위 1%인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0.0001% 정도나 되려나요? 그런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징징거릴 거면, 존재할 필요가 없죠. 사유의 성장은 결핍에서 오는 거니까요.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최고로 못 생기고, 최고로 가난한 사람뿐일까요? 오히려 가방끈 긴 사람들이, 외모 끝판왕 연예인들이 정신과 주 고객인 이유는 또 뭘까요? 결국 이런저런 굴욕은 피할 수가 없어요. 어딘가에선 조금 대접받고, 어딘가에선 또 무시당해요. 골고루 다 겪는 게 사실은 공평한 거 아닐까 싶어요. 굴욕의 순간이 없었다면, 상처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상처는, 네 탓이다. 네가 못 나서다. 그런 잔인한 결론을 약자들에게 강요했을 거예요. 보세요. 굴욕은 의미 있는 상처였어요. 수업이었어요. 문득문득 생각나는 건, 성장에 쓰라는 거겠죠. 연료로 쓰라는 거겠죠. 그런 굴욕감도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 가기는 해요. 앞으로 또 새로운 굴욕이 찾아올 테니, 그걸 또 성장 연료로 써야죠. 내게 필요한 감정이라, 또 찾아왔구나. 다음번 굴욕은 버선발로 마중 나가려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상처에 대한 글과 추억에 대한 글을 즐겨 씁니다. 제가 이렇게나 상처가 많은 사람이고, 과거 지향적인 사람인 줄 몰랐어요. 쓰면서 알게 됐어요. 나를 알게 되는 시간이에요. 글을 쓰는 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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