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은 꽉 차있나요, 적당히 비워있나요?
"이게 뭐예요?"
"어? 공갈빵이네!"
지난 설날 저녁 아이들 할머니댁에 들렸다 뭔가 간단하게 먹을 것이 없을까 하며 동인천역 인근 신포시장을 들렸습니다. 정말 너무나 오래간만에 들렸던 시장이었습니다. 설밑이라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고 들어선 시장에서 우연히 공갈빵 파는 가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공갈빵을 파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옛날 분위기의 시장인데 MZ세대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던 것이죠. 일단 연휴 저녁 시간에 줄을 서고 있다면 틀림없이 맛집일 것이다라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말이죠. 줄의 끝을 찾아 첫째 아이와 줄을 섰습니다. 줄을 서 보니 이제야 주변이 보였습니다. 시장 안의 화려한 가게들 사이 구석진 코너였습니다. 공갈빵 가게, 아니, 정확하게는 산동만두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공갈빵을 사러 온 사람들이었고, 공갈빵도 성인 1인에 2개, 아이들은 1개만 판매를 하는 등 제한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구석진 가게를 알았는지 저녁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10여 명 훨씬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갈>
언어나 행동으로 상대방을 겁을 주지만 실제로는 아무 실속이 없고 거짓된 행위를 이르는 말. 엄연히 법률 용용어로도 용어로도 쓰인다. 실체가 없는 거짓말이란 점에서 구라나 뻥카 등의 다른 속어 와도 연관이 있다. 블러핑도 얼추 비슷하긴 한데 공갈의 공은 무서울 공인만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공갈빵>
사실 빵이 아니라 과자의 일종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빵빵한데 "속에는 공기만 든, 말해 속의 내용물은 별로 없는데 겉만 크게 부풀렸다." 한입 베어 물고 나면 "속았다!"라고 깨닫게 되기 때문에 공갈+빵처럼 생긴 외양으로 인해서 공갈빵으로 불리게 된 듯싶다.
(출처:나무위키)
하나씩 하나씩.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하나 부숴서 먹고, 집에서 또 하나를 부숴서 먹었습니다. 첫째 아이는 처음에는 너무 딱딱해서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하고 살짝 고민하기도 했지만, 연신 "생각보다 맛있네!" 하며 먹습니다. 첫째가 먹으니 둘째도 언니를 따라서 얼른 공갈빵 한 조각을 입에 넣습니다. 한입 역자마자 또 달라고 하는 둘째를 보면서 왠지 아빠로서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연히 찾은 맛집이라는 점과 정말 공갈빵이 생각보다 맛있다는 점에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예전 국민학교 시절의 추억도 떠 올랐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손주인 저를 동네 시장에 데리고 나가 "이거 하나 먹어봐라"하며 손에 쥐어주던 그 공갈빵의 추억 말이죠. 물론 다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하게 이걸 어떻게 먹나 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저를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외할머니의 얼굴과 공갈빵을 깨서 한 조각 제 입에 물리시며 뿌듯해하셨던 외할머니의 함박웃음을 보고 싶게 만듭니다. 그런 기억이 오늘 공갈빵을 찾게 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 우리 첫째와 둘째는 공갈빵을 보면 이 아빠를 떠 올리겠죠?
속이 비어있는 빵이라니.
만약 공갈빵의 속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꽉 찬 빵? 알찬 빵? 실속빵? 그런데 별로 특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에는 속이 꽉 찬 빵들이 많이 있습니다. 팥이나 치즈, 크림 등 맛을 낼 수 있는 각종 놀라운 재료들로 가득 채운 빵들 말이죠. 그러니 그냥 속을 비워 둔 빵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을 사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속이 비어있는 빵보다는 뭔가 알차게 꽉 차 있는 빵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속이 비어 있어 오히려 특별한 빵.
공갈빵은 속이 비어 있어 특별한 빵입니다. 실은 빵보다는 과자에 더 가까운 느낌이기는 합니다만. "공갈"이라는 말이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나름 치명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빵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조만간 이 빵을 사러 또 인천에 한번 가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시장 안 만두집의 긴 줄을 찾고 그 줄의 가장 끝에 서야겠지요. 아빠로서 사명감(?)으로 공갈빵을 받아 든 두 딸의 함박웃음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꽉 찬 삶?
공갈빵을 보며 나의 삶을 비교해 봅니다. 그동안 늘 채우기에만 급급하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조금이라도 더 갖지 못하면 잠도 자지 못하며 아까워했고, 조금이라도 남보다 뒤처지면 억울해했습니다.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그저 "머리로 아는 말"이기만 했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이라면 때로는 오히려 놓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뒤돌아서 떠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쯤 저 속이 텅 비어있지만 오히려 더 맛이 좋은 공갈빵 같은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요? 제 가슴속 언제나 잔잔한 미소로 기억되는 외할머니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새삼 외할머니의 웃음이 그리워지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