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악하지 않다"

헛소리 모으기 14. 아무도 모를 악의 경계

by 모두다

은 나쁜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다. 악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나쁜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악이 나쁘다는 것은, '악'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명제다.

그리고 악은 나쁘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기피하고 멀리하고자 한다. 몇천 년의 역사 동안 쌓여온 종교와 철학, 도덕, 법 등의 체계 역시 악을 나쁜 것으로 여기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말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은 악행을 쉽게 행하지 못하며, 악을 목격하면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과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악하다’라는 것을 ‘나쁘다’는 형용사적 표현의 최상급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보고 ‘악한 사람’이라는 평을 내리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기껏해야 ‘이기적인 인간’, ‘또라이’, ‘못난 놈’, ‘쓰레기’, ‘사이코패스’ 등의 멸칭 정도나 붙인다. 조금 감정이 격해져도 ‘씨발새끼’, ‘개새끼’와 같은 비속어가 따라붙지, ‘악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christian-lue-1p0sGWYCSGE-unsplash (1).jpg Copyright 2019. Christian Lue

‘악’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쓰이거나 구어체적 표현이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조금은 추상적이며, 실감하지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악하다’는 표현의 사용에 조금은 신중한 경향이 있다. 악하다는 것은 갱생과 개선의 여지도 없는, 최극단의 상태에나 쓰일 법한 표현처럼 느껴진다.

가까운 누군가에게 “넌 악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보라. 위에서 말한 비속어로 모욕하는 것 이상으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악’이라는 개념을 기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악의 존재


하지만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우리가 그렇게나 ‘악’을 몰아내고자 부단히 노력해도 ‘악’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이 땅에 등장한 이래, 지구라는 행성에서 ‘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흠, 잘 모르겠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일단 무엇을 악으로 규정하고. 무엇을 악이 아닌 것으로 규정할 것이냐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일단 보편적인 개념에서 많은 이들이 ‘악’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남을 해치는 것이 악이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형태가 없는 가해부터 폭언과 폭력, 크게는 살인까지, 우리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으며, 이를 꾸준히 저질러오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이것에 특화된 종 같기도 하다.


daniel-n9yEuk5HhSM-unsplash (1).jpg Copyright 2020. Daniel

이 해치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아마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란 그 목적과 본질부터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 규모를 불문하고 인명사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iam Durant, 1885~1981)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연도는 7.8%에 불과하다고 한다.¹ 이것은 기록된 역사에 근거한 추정치이므로, 기록되지 않은 작은 분쟁과 전쟁까지 합한다면 아마 그보다도 적을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2024년까지 전쟁이 없었던 연도가 단 한 해도 없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인류사 중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기간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단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뿐 아닌, 크고 작은 범죄와 범죄의 영역에는 들지 않는 사소한 악행까지 합친다면, 아마 이 지구에는 언제나 악이 존재해왔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악을 싫어하지만, 동시에 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에 익숙하기도 하다.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악을 싫어하는데, 왜 악은 항상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주장대로 인간은 천성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감히 내가 대답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악을 저지르는 주체 역시도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전쟁은 계속해서 우리 인류를 괴롭히면서도 함께해온 반려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와 동시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항상 인간이었다. 그리고 전쟁에 나서는 것 역시 인간이고, 전쟁에서 죽는 것도 인간이었다. 인간이 일으키고 인간이 수습하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집단 행위. 그것이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은, 모두 악을 선호하는 분류의 인간들인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선전포고를 했던 지도자들, 그리고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쟁에 나서게 된 병사들까지, ‘나는 사람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임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stijn-swinnen-qwe8TLRnG8k-unsplash.jpg Copyright 2017. Stijn Swinnen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휘말리게 된 사람 중, 살인이라는 행위가 악행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쟁에 나서게 되면 그 악행을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악은 나쁜 것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전쟁에 나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기에 병사와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세뇌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다. 즉 전쟁에 명분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족을 보호한다든지, 신의 뜻이라든지, 조국을 위해서라든지 등... 그 명분은 붙이기 나름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명문이 붙여진 전쟁은 더 이상 악이 아니게 되었다. 그와 반대로, 악에 대항하는 선을 행하는 행위가 되었다. 악은 전쟁을 통해 인간을 죽이는 자신들이 아닌, 자신들에 맞서는 적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악의 축’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통해 갖가지 전쟁에 휩싸이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선과 악이라는 것은 규정의 문제로 변질된다. 악으로 치부되던 행위도 우리가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으면 악이 되지 않는다. 나치의 독일 제국 역시, 몇백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자신들의 홀로코스트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독일 민족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두 번 다시는 독일이 비극적인 역사를 겪지 않기 위한 일종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조국과 민족의 안녕을 위한 행위라는 데, 이것을 감히 악행이라고 비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정확한 방법은 몰라도, 아무튼 나의 조국을 망쳤던 유대인이 사라졌다는 것이 당시의 독일 국민들에겐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를 실현시킨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구국의 영웅이며 민족의 구원자였다.

이 도식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도 같다. 22만 제곱킬로미터의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두 국가의 정부와 국민은 각자 자신들이 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악은 바로 38도선 너머의 적국이다. 이 이분법에 감히 의심을 품는 사람은 사상범으로 몰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한반도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전쟁들에서, 스스로를 악의 세력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어디 있는가? 모두 자신들의 전쟁은 합당한 명분을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자신들은 선한 사람들이고, 자신들과 맞서는 이들은 악한 사람들이라는 도식으로 이어진다. 모순적이게도 서로가 이런 도식을 내세운 나머지 2개의 선과 2개의 악이 공존하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린다.




어디까지가 악인가?


mostafa-ft-V7-1iNassg4-unsplash.jpg Copyright 2022. mostafa ft

이렇게 생각하니 절대선절대악이라는 것이 과연 실존하는 개념인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생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명제에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매일 식사라는 형태로 다른 생명 죽임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또한 마냥 확신을 갖기는 어려운 명제인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식사 행위 자체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식사를 멈추면 우리의 생명 역시 멈춰버리니까. 육식과 채식, 그 외 다른 식사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우리가 매일 입에 넣는 것은 다른 무언가의 생명이 남긴 영양분이다.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 비도덕적이고 악행에 가깝다는 의식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는 이를 매일 수행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메여있다.


그리고 이 운명은 비단 인간만의 것이 아닌,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 사항이다. 손톱보다 작은 벌레들도 다른 생명체를 갉아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초식동물이 하루에 뜯어먹는 풀만 하더라도 몇제곱 미터에 달한다. 그런 초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는 육식동물의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생명체는 기껏해야 식물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 정도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굳게 믿는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것도, 결국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에너지 순환 과정 정도에 불과하다. 동물이 야생에서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자. 겁에 질려 전력으로 달아나는 동물들, 그 중 운이 없는 개체에게 파고들어지는 발톱과 이빨. 그 동물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발버둥치지만 이윽고 목이 부러져 죽어버린다. 사체의 선홍빛 살점은 육식 동물들에게 뜯어 먹히고, 장기와 뼈에 붙은 근육들은 스케빈저들의 식사가 되고, 채 해치워지지 않은 부산물은 벌레들이 처리한다.

참혹한 광경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며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곤 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뤄나는 일이다. 이상할 것 하나 없이, 몇억 년 전부터 오늘까지 매일같이 일어난 아주 평범한 일에 불과하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갖는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연은 이런 현상을 장려한다.


luis-del-rio-camacho-nadEf7Yjb_Q-unsplash (1).jpg Copyright 2015. Luis Del Río Camacho

그럼 우리는 이런 자연을 ‘악’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의도와 목적도 없는 자연 현상에 우리의 도덕적 잣대를 함부로 들이밀 순 없기 때문이다. 한 동물이 사냥당해 무력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 안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거나, 그 동물을 사냥한 다른 동물을 악하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역시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런 딜레마에 봉착한 적이 있다. 그는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Asa Gray, 1810~1888)에게 쓴 편지²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자연 현상과 도덕관념과의 괴리를 표현했다.

‘살아있는 애벌레의 몸에 살을 파먹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드러내는 기생벌을, 자애롭고 전능하신 신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시키지 못하겠다.’


기생벌의 한 종인 맵시벌은 산란기가 되면 자신의 자식을 키울 숙주를 찾아 나선다. 나무에 붙어 그 안에 있는 다른 벌레의 유충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산란관을 꽂아넣어 자신의 알을 기생시킨다.

알에서 깨어난 맵시벌의 유충들은 자신이 기생한 다른 종 유충의 몸을 갉아먹으며 자라난다. 먹잇감이 된 곤충은 이제 맵시벌 유충들의 집이자 먹이의 역할로써 자신의 생명을 다할 뿐이다. 참으로 잔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 기생벌의 잔인한 방법은 번식을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이유로 변호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생존과 별개의 이유로 다른 생명을 괴롭히는 동물이 있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도덕관념을 따져야 할까?


killer-whale-1.jpg Copyright 2020 slowmotiongli

범고래는 지능이 높은 동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인간과의 정서적 교류는 물론이고 범고래끼리 소통하는 울음소리에는 방언과 같은 지역적 차이까지 존재한다고 한다.³ 언어가 인간만이 지닌 고유의 특성이라는 상식에 대한 반례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지능 덕분에 범고래는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포식자다. 무리지어 먹잇감이 지칠 때까지 쫓아다니고, 단순히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닌 지느러미로 공격해 기절시키는 등의 다양한 사냥 방식도 사용할 줄 안다. 먹잇감도 일반적인 작은 물고기부터 조류, 같은 포식자인 상어, 심지어 자신보다 거대한 고래까지 노릴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범고래는 장난을 잘 치는 동물이기도 하다. 같은 종끼리는 물론, 다른 종인 인간에게도 장난을 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곤 한다. 바다나 연안에서 사람을 발견하면 다가와서 살짝 부딪히는 등 과격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선박에 큰 손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물어뜯기도 하고, 얼음조각을 던지기도 하는 등 놀이의 개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⁴

이에 더 나아가면, 먹이로 삼을 목적이 아니면서도 괜히 다른 동물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거대한 꼬리 지느러미로 다른 수생 생물들을 때려 기절시키고 사라지는 것이 주된 방법이다. 심지어는 죽여놓고 먹지도 않고 내버려두는 경우도 있다.


언뜻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먹이로 삼을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저런 불필요한 살상을 행하는 걸까? 그것도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까지 말이다. 범고래는 자신들의 사회 집단에서도 다른 종을 따돌리는 습성도 지니고 있다. 흔히 왕따라고도 부르는 집단 괴롭힘을 행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집단 괴롭힘은 범고래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성은 아니다. 침팬지, 개, 돌고래 등 지능이 높고 사회를 이루는 동물의 집단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이런 집단 괴롭힘의 문제는 존재한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린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집단 괴롭힘을 악으로 규정하지만, 이 도덕적 잣대를 동물 사회에까지 들이대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학교폭력이 민감한 사회적 이슈가 되어가는 요즘의 인간사회에서 집단 괴롭힘의 가해자는 엄청난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동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집단 괴롭힘에 대해선 우린 안타까워하면서도 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범고래는 이유 없는 살상을 저지르고 집단 괴롭힘을 가하는 동물이다. 여기서 ‘범고래’라는 단어를 제외시켜보자. ‘이유 없이 살상을 저지르고 집단 괴롭힘을 가한다.’라는 문장으로 만들어본다면, 이 문장을 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사악하다거나 못 됐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며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범고래가 저지르는 행위라는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으냐 옳지 않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evan-dennis-i--IN3cvEjg-unsplash (1).jpg Copyright 2016. Evan Dennis

왜 그런 것일까? 도덕이라는 관념은 오직 우리 인간의 전유물이기 때문일까? 자연에 대해 도덕을 따지는 것 자체가 조금은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인간에게 국한한다. 도덕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행위의 이유로는,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특별한 개체로 구분 짓는 우리의 습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본능에 의해 살아가기보단 이성과 도덕을 통해 살아야 한다.’

이런 관점은 인간이 처음으로 사회를 꾸린 시기부터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관점이지 않을까? 인류가 가축을 이용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도 동물에 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동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타인을 모독할 때 동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습관만 보더라도, 우리는 동물을 인간보다 더 격이 낮은 존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자연현상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다는 것이다. 지진과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가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러기에 인명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 어떤 나쁜 결과가 일어나더라도 지나가 버린 자연재해에 도덕적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수많은 자원을 들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대피 훈련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에 불과하다.


결국 선과 악이라는 것은 그 개념을 알고 자신의 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과 악의 구분은 너무나도 자의적이다. 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어떨 때는 선한 행위가 되고 어떨 때는 악한 행위가 된다.

그러기에 우린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하에 공통적인 도덕관념을 추구하지만, 그조차도 우리 사회 외부의 시선에서는 동의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동성애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된 비도덕적 행위이다. 하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러지 않으며, 도리어 성적 지향성에 대한 차별 자체가 불법 행위이며 비도덕적으로 여겨진다.

이같은 간극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이 지구 상에는 오직 하나의 공통 문화권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이를 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 국가가 전 세계의 모든 국가를 점령하거나 흡수하는 방법일 것이다. 글쎄, 그 현실성은 둘째치더라도 썩 도덕적인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선과 악이라는 건 실존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일까? ‘예’와 ‘아니오’ 둘 중 하나의 대답만 하라고 한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통용되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통용 관념이라는 것 역시 그 관념을 사용하는 주체에 의해 일관성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관념이다. 그리고 법은 살인죄를 엄중하게 처벌하는 방법을 통해 이 관념을 굳건히 보호한다. 하지만 오히려 법이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사형이라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사형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사람을 죽인 자를 처벌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니. 물론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사형 제도가 축소되고 있긴 하다만, 그래도 인류가 오랫동안 사형을 애용해온 종족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믿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존재이다. 이 상대적인 존재에서 ‘절대’라는 것을 추구하는 건 모순적인 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악이라고 치부하며 기피하는 것 역시 악이 아닐 가능성이 존재한다.


andreas-fischinger-JRjaNVotNlA-unsplash.jpg Copyright 2020. Andreas Fischinger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은 그저 유명무실한 개념일까? 윤리와 선을 추구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그럼 우리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것 또한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도덕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이라고 믿고 추구해왔던 것이 선이 아닐 수 있다. 절대적인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행이 타인에겐 악행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선을 추구하는 인간에겐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의심해야만 한다. 자신이 분류해 둔 선과 악에 대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도덕 관념에 대해서, 자신이 믿고 따르는 윤리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행하는 것은 선이다.’라는 결론은 결국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거에 그칠 뿐이다. 그리고 우린 인류는 이런 논거를 통해 끔찍한 일들을 자행해 온 역사를 지닌 생물이다. 우리가 되풀이해야 할 것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과연 선이 맞느냐는 질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 격언은 우리에게 스스로에 대한 답을 내리라는 격언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즉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거치라는 의미이다.

과연 우리는 이 격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까? 이 또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만 할 것이다.








각주

¹. William Durant, "The Lessons of History", Simon & Schuster, 1968

². Charles Robert Darwin, "Letter to Asa Gray", 1860.05.22

³. Foote, A. D. Osborne, R. W. Hoelzel, "A Temporal and contextual patterns of killer whale (Orcinus orca) call type production", Ethology, 2008

⁴. https://www.livescience.com/3284-scientist-snowball-fight-killer-wha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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