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평범한 오후였다. 매일 같이 지내는 하루가 유난히 무기력하게 느껴지던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아이들은 지금 봄 방학 중이라 시간이 많다. 오전 내내 자유를 누리던 아이들. 그래서 식사가 마친 후 나는 한글을 잘 못하는 큰아이에게는 한글 쓰기를, 아직 수업시간에 필기해 오는 것도 힘들어 하는 둘째 아이에게는 영어 쓰기를 시켰다.
무엇을 했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던 오후, 나는 아이들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평상시 보다 훨씬 어두웠다.
사실 오늘 아침부터 하늘이 온통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모두가 우울한 날이라고 이야기 하는 회색빛 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회색빛이 아니다. 검은 빛이다.
멀리서 큰 재앙이라도 불어올 것만 같은 검은 하늘.
이제 씨를 뿌린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옥수수 밭의 흙들이 작은 회오리바람과 한패가 되어 이리 저리 날아다녔다.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에 태어나 이제 첫 우기를 맞이하는 아기 고양이들도 그리고 벌써 한 번의 우기를 겪어 본 엄마 고양이 릴로도 문 밖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겁쟁이 셰퍼드 심바는 처음 내리 친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꼬리를 내리고 방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밖에 나가 있어야 한다고 덩치 큰 녀석이 창피하지 않냐며 심바를 밀어내도 꼼짝도 않는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바깥에서 키우던 심바도 집안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사실 천둥을 피한 것일 것이다.
폭우는 점점 더 심해 져서 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우리 집과 주변을 돌았다.
날이 좋을 때면 히말라야 산맥의 한 봉우리인 칸첸중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이곳.
칸첸중가 산은 매 해 3월, 4월이면 산책을 하러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내려오나 보다.
가끔 볼 수 있는 만년설도 가려버린 구름들,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강풍. 그리고 평생 한국에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천둥과 번개들.
칸첸중가 산은 그렇게 큰 무리를 동반하며 평지 산책을 하나보다.
그래서 이곳의 3월 4월은 참 평범하지 않다.
비가 내리자 우리 집 길 건너 쪽 감자 밭에서 감자를 캐던 일군들이 모두 옆집 처마 밑으로 모여들었다. 비를 피해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조차도 뿌옇게 가려 버린 폭우.
방안에 있는 심바와 고양이 가족들은 바깥에서 부는 바람 소리와 천둥소리에 긴장한 듯 앉아 있다. 그 와중에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침대 위에 앉아서 보드 게임을 하고 있는 두 녀석들. 아이들은 이미 매년 찾아오는 칸첸중가 산의 방문이 익숙해 졌나 보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일꾼들도 건물 아래에 몸을 숨긴다. 작은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처음 보는 폭우 속에서 길을 잃어 어쩔 줄 모르며 달려가는 모습이 애타기만하다.
거할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했다.
바깥의 폭우를 아늑한 방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한 차례의 폭우가 지나가더니 한 낮처럼 따스한 햇볕이 테이블 위를 비췄다. 덩치 큰 우리 집 심바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거실에 바닥에 누워 있었고 고양이 가족은 서로의 몸을 포개가며 따뜻한 우기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빗소리 대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 오후.
나는 책 위로 넓게 비추는 반가운 햇빛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오후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