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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미 Jun 09. 2021

시어머니는 을, 며느리는 갑

코로나 자가격리 그리고 고부갈등

작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그래서 2년 만에 코로나가 잠잠해졌다 싶을 때쯤 그러니까 올해 3월 말에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우리가 한국을 나온 이후로 인도의 코로나 확진자는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한국 방문의 시작은 어머님과 함께였다. 자가격리를 할 곳이 마땅치 않은 우리를 위해 어머님은 흔쾌히 집을 제공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어머님과의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 어머님 댁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밤11시가 넘어 도착한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우셨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들 가족을 2년 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2주 간 어머님은 우리와 같은 상에 앉아 밥을 먹지는 못했지만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해하셨다.

손자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하셨고 우리 가족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시며 또 아껴두었던 과일과 곶감 등을 주시며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그리움을 풀으셨다.

혼자 사시는 작은 아파트에 아들네 식구가 왔다 갔다 하니 정신없으셨을 텐데도 어머님은 그저 싱글벙글하셨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2주가 넘어가면서 어머님은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셨다. 큰 손자는 잘 먹지 않아서 할머니께 혼나고 작은 손자는 너무 먹어서 할머니께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는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너무 늦게 다녀서 어머님의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늦은 밤 아이들과 조심스레 어머님 댁에 들어갈 때면 소파에 앉아서 잠도 못 자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어머님을 보곤 했다. 아들 식구 피곤할까 걱정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해 역정을 내시곤 하셨다.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트레스를 표현하시는 어머님 때문에 아이들도 나도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엄마와 통화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랜만에 해외 살다 들어온 딸 내 식구들이 집에 와서 신이 났던 친정 엄마가 있었다고 한다. 사위 맛있는 것 해주겠다고 씨암탉도 잡고 딸과 손자 좋아하는 과일들도 준비하면서 정말 행복했던 친정 엄마. 그런데 코로나가 터진 것이었다. 딸은 해외에 즉 집에  갈 수가 없게 되었고 덩달아 사위도 처갓집에서 긴 시간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처음 한 두 주는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정 엄마는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딸 가정과 함께 사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을 웃었다. 나중에 코로나가 덜해지고 사위가 다시 해외로 나가게 되었을 때 얼마나 속이 시원했겠냐면서 말이다.

그랬다. 아무리 자식이어도 부모 집에 얹혀사는 것은 짐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가격리가 끝나고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어머님 댁에서 지냈다. 어머님은 어머님 대로 생활 방식이 다른 우리 가족과 함께 사느라 힘들어하셨고 나는 나대로 어머님께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렇게 시작은 울며 서로를 반갑게 맞았으나 헤어질 때는 참 서먹하게 헤어졌다. 남편은 말했다.

"야. 진짜 시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건 쉽지 않아. 그치? 우린 나중에 처갓집 가서 살자."

"아이고. 여보. 처갓집은 뭐 다를 것 같어? 다 똑같애. 어디든 오래 있으면 짐이야. 짐!"

"그래도 고부 갈등은 없을거 아냐?"

나는 답변 대신 피식하면서 웃음을 보냈다.


인도에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바빴다. 짐 정리하느라 집 정리하느라 그리고 인도에 다시 적응하느라.

하지만 막상 어머님께 전화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잘 도착했다는 문자만 보냈다.

사실 나는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에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는 그래도 착하려고 노력하는(?) 며느리였다. 내게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전화로만 안부를 전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한국 방문 후 어머님과의 사이가 어색해지고 나니 전화를 걸기가 어려웠다.

전화를 걸자니 내가 너무 가식적인 것 같았고 또 어머님께 서운했던 내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은 달랐다. 인도로 출발할 때부터 우리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홀로 계신 어머님은 남겨진 자였다. 4명의 아들네 식구들이 북적북적 한 달 넘게 있다가 인도로 돌아가고 나니 많이 허전하신 듯했다. 남겨진 사람은 좀 더 힘든 법이니까.

나는 가족이 있었고 인도에서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바쁘게 살면 되는 거였다. 인도의 바쁜 생활에 적응했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은 막상 매일 전화하던 며느리가 전화하지 않으니 신경이 쓰이신 듯했다. 그날은 내게는 문자만 남기시고 남편과 전화통화를 하신 듯했다. 남편이 내게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당신 왜 전화 안 하냐고 묻네. 혹시 한국 있을 때 맘 상한 것 때문에 삐진 것 아니냐고."

"삐지긴.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그렇지 뭐. 그리고 사실 한국에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는데 전화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직까지는 마음도 안 나고."

그러자 남편이 이야기했다.

"그래. 며느리가 갑이지. 엄마는 왜 한국 있을 때 며느리한테 스트레스를 줘가지고는. 며느리가 전화 안 하면 손해 보는 건 엄만데."

그러고 보니 나는 손해 볼 것이 없는 갑이었다. 연락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갑 며느리. 그런데 홀로 계시는 어머님은 달랐다. 해외에 사는 아들 가족의 소식이 궁금한 외로운 을 시어머니였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용기를 내서 어머님과 통화를 했다.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인도 와서 바쁘게 지내느라 이제야 전화해요."

"그래. 잘 지냈어? 안 그래도 그런 것 같더라. 전화가 안 와서 네가 바빴나 했어. 너네 한국에 있을 때는 왜 그렇게 짜증이 나고 속상하고 화가 나던지. 내가 그때만 그렇지 또 다 잊어버리니까 혹시 서운했던 것 있으면 잊어버려. 내가 너네가 우리 집에서 지낼 때 잘 못해준 것만 생각하면......"

전화 너머로 어머님의 목소리가 많이 흔들렸다.

"아네요. 어머님이 고생 많으셨죠. 저희도 잘한 것 없고요. 전혀 그런 것 없어요."

"그래. 너네가 가고 나니까 텅 빈 거실만 봐도 너네 생각이 나고 남은 요플레만 봐도 애들 생각나고. 그래. 요즘은 마음이 자꾸 우울하고."

어머님은 우리가 떠난  홀로 남겨진 자만겪는 후유증을 앓고 계신 듯했다. 어머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어머님께 전화하기를 잘했다고 나를 다독였다. 아직 젊은 내가 홀로 외로이 계시는 시어머니를 상대로 갑질을 하는 것은 일주일 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기 시작했다.작년 내내 전화할 때마다 어머님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아직까지  정도로 친근하게 전화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시작한 지금 마음은 훨씬 편하다. 가까이 있을 때는 어머님 마음에 드는 며느리가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는  며느리가 되기로 했다.


*** 한국을 방문한 후 어머님께 전화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세요. "바쁜데 왜 했어? 신경 쓰지 마. 내가 궁금하면 할게."  한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도 서운하게 들리던 어머님 말소리가 전화 상으로는 왜 이렇게 아프게 들리던지. 아직까지는 전화 통화할 때만 좋은 며느리이지만 언젠가는 함께 있어도 좋은 며느리가 되기를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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