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던 날 만난 순수한 할머니와 그렇지 못했던 나
여느 때처럼 오후가 되자 소낙비가 내린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는 소낙비는 아무리 큰 빗줄기를 몰고 와도 반갑다.
아이들이 큰 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눈을 다른 데로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 딴짓을 하는 녀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 앞에 같이 앉았다. 그래도 내 눈은 어느새 지붕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들을 향해 있다.
비는 사람을 참 로맨틱하게 만든다.
함석지붕 아래로 신나게 떨어지는 빗물들, 들풀들 사이로 사정없이 내리는 빗줄기들, 그리고 벌써 움푹 페인 땅마다 고여 있는 흙탕물들, 비가 오는 구석구석이 아름답다.
한참을 구경하는데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남편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바깥 업무를 보러간 상태였고 그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남편은 분명 평소처럼 사무실 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런데 건물 앞에 한 낯선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는 작은 천 가방을 들고 자꾸 움직인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의 행동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곳 마을 사람들이 가끔 우리 물건들을 훔쳐간 적이 있었다. 신발이나 옷, 생필품 등 없어지는 것들은 그리 크지 않은 비싸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그들은 생계형 도둑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기 까지 했다.
나의 좋은 시력은 억수같이 내리는 그 낭만적인 빗줄기들을 뚫고 100미터 거리 건물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향했다.
‘그래.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거야. 지금 가방을 자꾸 만지작거리는 건 아마 우리 집 들판에 널려 있는 고사리들을 채취한 것을 정리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난 그렇게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머리에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남편은 분명히 사무실 문을 잠그지 않았을 텐데...’ 사무실에 놓여 있을 컴퓨터와 카메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 정문이 열려 있네. 저기 바로 실내화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가끔 실내화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쉽게 가져갈 수 있는 실내화 바로 앞에 서 있는 할머니를 보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산을 쓰고 달려 가 볼까? 아니야. 설마 뭘 훔쳐가겠어? 그래도.. 그래도 만약에...’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사무실 건물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아주 진짜 무엇인가를 훔쳐가는 진범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형사가 범인을 잡으려고 준비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큰 아이가 수학 문제가 어렵다며 내게 도움을 청해도 둘째 아이가 글씨를 삐뚤삐뚤하게 쓰고 있어도 난 뭐가 그리 불안한지 그 할머니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빗방울 소리도 줄어들고 장대 같은 빗줄기에 흔들리던 들풀들도 조용히 쉼을 청하고 있을 때 쯤 할머니는 가지고 있던 주머니를 들고 사라졌다.
물론 그녀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정말 그녀는 순수하게 우리 건물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던 한 마을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 그리고 나는 ...
작은 소유물들 때문에 그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그런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억수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우리 집 지붕에서 간간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작은 물방울들이 몇 초에 한 번씩 떨어질 때 마다 내 마음을 흔들며 말했다.
‘너의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너를 이토록 부끄럽게 만든 거니?......’
난 그 물방울들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황급히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방 안속 깊이 들어갔다.
그런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