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씨 착한 호랑이]그림동화책 리뷰
호랑이 아저씨가 아파서
여러분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동물 숲의 해결사, 호랑이 아저씨. 어떠한 문제도 척척 도와주는 호랑이이지만, 어느 날 짐가방을 싸 들고 집을 떠납니다. 문 앞에 남겨진 것은 메모지 한 장.
호랑이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한계 설정 없는 희생은 백해무익
이 동화책을 읽다 보니, 저의 모습이 겹쳐 씁쓸했습니다. '거절'과 '화'를 표현하는 일이 어렵다 보니, 어느 사이에 번 아웃되어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일단 멈춤'태세에 들어간 지 최근입니다. 스스로 건강한 자아경계 설정이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바로잡을 의지나 에너지가 없어 나 자신을 내어주고 분노의 감정을 바지런히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동화 속 동물 친구들도 바운더리 설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나 보네요. 늦은 밤, 이른 아침 구별이 없습니다. 아무 때나 쉴 새 없이 들이닥쳐 이것저것 요구하는 동물들을 도와줘가며 호랑이의 줄무늬는 점점 희미하여지다 거의 사라지기에 이릅니다. 호랑이가 무늬가 없어지다니, 은유로 해석해도 좋겠습니다. 나의 공간, 나의 영역, 나다움, 자아가 서서히 짜부라지고 흐려져 타인의 요구와 자극에 반응하는 유령으로 변해가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혹, 나 자신이 겹쳐지신다면 지금 이 시간,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군요. 본래 내 몸의 무늬가 어떠했었는지, 호랑이였는지조차 잊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요. 한편으로는 줄 무늬가 사라져가는 피로한 호랑이에 이 시대의 평범한 직장인들의 모습을 투사해보게 되네요.
출처: BBC 뉴스 코리아 | "나쁜 조직문화, 재택근무 때도 지속되는 이유", 2021.08.22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많아졌지요. 그러나 모두가 자유로운 근무환경을 누리게 된 건 아니랍니다. 웬걸, 부정적 조직문화의 폐해가 강해졌다는 뉴스가 bbc 코리아에 실렸습니다. 특히 상사의 통제와 간섭이 더욱 심해졌고, '팀뷰어' 또는 업무 측정 소프트웨어 등을 통해 관리의 강도가 오히려 높아졌다는 것이지요.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관리자는 확인을 할 수 없다는 불안과 의구심에 통제 욕구가 더 높아졌을 것이고, 출퇴근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사적인 공간마저 침해받으며 직원들의 피로도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전까지 "회사의 부족한 지원, 열악한 대인관계, 많은 업무량, 부족한 자율성과 보상 및 고용 안정성(아디탸 자인, 노팅엄 경영 대학)"의 문제 등이 부정적인 조직문화의 요소로 이야기되었어요. 그런데 이에 더해 최후의 보루인 사적 영역마저 업무 영역에 먹혀버림으로써 심리적 위협 정도가 더 심해진 것입니다.
위 기사의 케이스는 부정적인 조직문화와 관리 직급의 과도한 통제 욕구가 초점인 경우이지만, 이도 근무와 사생활의 경계 구분이 어렵게 되며 발생한 문제를 결국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경계에 주목하다
바운더리 심리학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정한 바운더리를 유지할 때 개인의 심리와 대인관계가 건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Boundary란 자신과 타자를 구분 짓는 '자아경계'를 뜻하는 심리학 용어예요. 개인의 신념, 태도, 과거 경험, 판단, 학습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 한 사람의 관계 및 생활에서의 대처 방식이라고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타인의 요구를 거절 못 하고 들어주거나, 타인을 도와주는 방법으로만 스스로 만족을 얻을 수 있으신가요?
타인의 기분에 좌지우지되고 타인의 평가가 중요하여 나의 생각과 주장은 뒷전으로 미루시는지?
누군가와 교류하고 협업하는 일, 상의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아예 차단하거나 회피하시나요?
지시와 요구를 따라주지 않는 상대방에 감당 못할 분노가 치솟아 이성을 종종 잃으시나요?
통제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지요?
자아경계가 지나치게 흐릿한 것도, 너무나 견고하여 틈이 없는 것도 건강한 바운더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타인을 지나치게 통제하려 함도,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쪽도 바운더리의 재설정이 필요합니다.
한계 설정과 유연성
그림책의 주인공으로 돌아가 볼까요? 다행히 호랑이 아저씨는 완전히 자신을 잃기 전에 휴가를 떠났답니다. 숲속 동물 친구들은 집을 비운 호랑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안함과 감사함을 담아, 언젠가 돌아올 호랑이를 위해 집을 꾸미고 현관 문 앞에 알림을 적어놓지요.
호랑이 아저씨는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만
골칫거리를 들어줍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호랑이는 팻말을 보고 빙그레 웃고, 동물 친구들이 적어놓은 메모에 한 장을 더 추가하여 놓지요.
하지만 급한 일이 있을 땐
언제든지 초인종을 누르세요!
네, 그렇습니다. 덧붙인 두 번째 메모의 내용까지 수렴될 때 건강한 관계가 가능하답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것. 스스로 결정하며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준과 상황이 충돌할 때 자율성을 잃지 않으면서 조절할 수 있는 유연성 또한 갖춥니다. 이러한 상태가, 모두에게 좋은 바운더리 설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이는 필요합니다. 아이의 요구에 끌려다니고 무조건 희생하는 것이 능사도 아니고, 아이가 아이 답지 못하게 부모를 돌보거나 눈치 보게 되는 상황도 문제가 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분신이 아니기에 아이만의 신체적ㆍ정신적ㆍ영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부모님들에게도 그들만의 시간과 생활이 필요한 사실을 자녀들이 받아들이도록 적당한 나이가 되면 가르쳐주셔야 하고요.
공의존하는 부모 자녀 관계의 내담자 내방 시 바운더리를 재구축하여 주려다 밀착된 가족의 구조에 균열이 가면서 부작용이 오기도 해요. 갑자기 연락을 끊고 상담을 그만두시거나, 때로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격렬히 항의하기도 해요. 가족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없더라도 경험 상, 가능한 많은 구성원이 상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일방적이거나 파괴적인 작업이 되지 않도록 세심히 나아가는 완급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적일 정도로 서로 융합되어 있는 가족이라면 더욱이요.
저 역시 잠시 멈춤 단계입니다. 노란 신호등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은 후 정비를 하고 다시 출발하기 위해 충전 중입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환경과 다른이의 요구에만 반응하는 유령이 되기 전에 '일단 멈춤'해 보셔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길, 여러분의 휴식을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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