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엄마를 기억하며
우리 엄마는 위암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던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사실 그땐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그냥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것 같다. 졸업식에도 엄마는 오지 못 하셨다. 마땅히 뚜렷한 목표가 없는 데도 나는 재수를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일이나 할 걸, 일이나 해서 모자나 신발, 맛있는 거나 사드릴 걸 후회가 된다. 가장 소중했던 몇 년을 나는 코미디를 한다는 명목으로 낭비해버린 건데, 그래도 코미디로 밥은 빌어먹고 사니 하늘에서 엄마가 마음은 놓고 계실 듯하다.
나는 불효자였다. 엄마가 아팠을 때 해드린 거라곤, 주유소 알바 월급으로 파리바게트 빵 3만 원어치를 사드린 것, 생신 선물로 고작 모자 하나 사드린 것, 오랜만에 집에 왔을 때 가래떡을 사드린 것뿐이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전부 후회로 남았다. 가래떡을 사 왔을 땐 '왜 사 왔느냐'라고 엄마가 물은 적이 있다. 아마 '가래떡을 먹으면 오래 산대요'라는 말을 듣고 싶으셨겠지만, 나는 예전부터 희한한 자존심이 있어서 차마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가슴 아픈 일은, 엄마가 병원에서 같은 병실 사람들과 함께 중고로 아디다스 신발을 샀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예전부터 브랜드 옷이나 신발을 안 입으셨다. 아마 당신이 꾸밀 돈으로 다른 곳에 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셨겠지. 그런데 그런 분께서 중고로라도 브랜드 신발을 사셨다니, 그런데도 엄마에게 새 신발을 선물하지 않았었다니. 과거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이런 나에게 '엄마'를 글감으로 '이용'하는 것 또한 죄책감이 드는 일이다. 가끔씩 행복한 순간이나 웃긴 동영상을 보며 피식피식 웃을 때,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때도 있다. 죄책감은 언제까지 갈까. 조금씩 옅어지겠지만, 아마도 45살 정도까지는 지속될 듯싶다. 내가 방송작가로 일하는 모습을 엄마가 보셨어야 할 텐데, 농담으로 밥 빌어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주 든다. 생각해보면 슬픈 내가 코미디를 한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어쩌면 코미디는, 그리고 농담을 시작한 계기는 '나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다. 슬픈 농담은, 마치 슬픈 가사를 가진 신나는 노래처럼 진하고 사랑스러운 맛을 낸다.
비가 오던 날. 파주의 운정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간 적이 있다. 그날도 혼자 정처 없이 걸어 다녔는데, 우연히 장미를 보게 되었다. 평소에는 꽃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 순간에는 장미가 비를 맞아서인지 예뻐 보였다. 흡사 DSLR로 찍은 고해상도의 사진에서나 볼 법한 장미꽃 위의 물망울들. 그 예쁜 장미를 나는 엄마에게 주고 싶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속으로 계속 갈등했다. 결국 나는 장미를 꺾지 못했다. 그 장미꽃을 꺾어갔더라면,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 발생하지 않은 작은 사건이 나에게는 후회로 남아있다. 장미는 나의 죄책감이다. 장미를 꺾는 죄책감을 선택했으면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을까. 다음 기일에는 장미꽃을 들고 가야겠다.
어느 청년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
이어서 청년은 무덤 앞에 다 시든 장미꽃 한 송이를 놓았다.
이를 본 행인이 혀를 찼다.
행인 : 쯧쯧. 기왕이면 생화로 사오지 않고.
청년 : 네? 죽은 사람한텐 죽은 꽃을 줘야죠.
행인 : ...?!
청년 : 그래야 로켓배송으로 바로 가는데. 죽은 사람한테 산 걸 어떻게 줘요.
그 순간, 행인은 청년의 논리에 납득당했다.
지난 30년 간의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년 : 쯧쯧. 그 생화는 배송까지 3일 정도 걸리겠네요. 고인이 기다리다 돌아가시겠네.
그 날 이후, 수목장 근처에는 시든 꽃이 더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한다.
엄마 없는 농담, <로켓배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