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블랙홀 그리고 오이소박이
나에게도 인플레이션처럼 갈수록 커지는 게 있다. 바로 엄마가 죽고 난 뒤에 느끼는 '공허함'이다. 공허함은 슬픔과는 또 다른 것이다. 엄마가 없어서 느끼는 슬픔은 시간에 비례해서 하향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엄마의 빈자리가 주는 공허함은 왜인지 묵묵히 상향 곡선을 그린다. 마치 미국 주식처럼 꾸준히 우상향을 하는 것이다. 이 공허함은 뭐랄까, 말 그대로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붕어처럼 엄마가 애초에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있다 없으니까 생길 수밖에 없는 그 빈 자리는 도통 사라지지가 않는 것이다.
고로 나는 구멍이 뚫린 인간이다. 구멍(Hole). 엄마가 죽으면서 남겼다. 아니, 내가 스스로 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게 공허함을 주는 이 구멍은 블랙홀처럼 행복의 일부를 조금씩 빨아들인다. 일상 속에서 작거나 큰 기쁨을 느낄 때, 갑자기 이 구멍으로 찬 바람이 슝슝 들어오곤 한다. 그러면 나는 100% 행복하거나 충만함을 느끼기가 좀처럼 힘이 든다. 행복이 새어나가는 것이다. 관측 불가능한 블랙홀처럼, 이 구멍이 어디에 위치한 건지는 모르겠다.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냥 행복이 새는 대로 사는 거다. 그저, 붕어빵 속에 든 꽉 찬 팥처럼 나도 언젠간 가득 채워지고 싶다고 소망할 뿐. 하지만 이 소망의 실현은 아마 불가능할 듯싶다. 엄마가 살아 돌아오거나 천국과 영상통화가 가능해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엄마가 가장 보고 싶을 때는 신기하게도 사소한 것들로부터 비롯된다. 가령 TV에서 나오는, 연예인들의 엄마들이 나이 든 아들에게 잔소리하는 예능프로 같은 거랄까. TV 속 연예인 아들은 나이에 안 맞게 엄마가 해준 반찬 투정을 한다. 그러면 이어서 연예인의 엄마가 복장이 터진다는 듯 답답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장면에서 나는 엄마가 해준 반찬, 꾸지람 같은 것이 부럽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침에 핫케익을 해주시곤 하셨는데, 맥도날드나 카페에서 보이는 핫케익 메뉴를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무슨 거창한 상황이 아니라 겨우 핫케익을 보고 엄마가 보고 싶다니.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구멍의 크기는 고작 핫케익만할 수도 있겠다.
나 : 돌아가신 엄마가 내 카톡을 안 읽어. 엄마가 '안읽씹'이라니 슬프다.
A : 근데 읽는 게 더 무서울걸? 갑자기 카톡 1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봐.
갑자기 장르가 공포로 바뀌었다.
엄마 없는 농담, <안읽씹> 중에서
엄마가 없는 식사는 조금 적막한 감이 있다. 아빠와 형, 나 이렇게 셋이 생선구이 집에 가면 맛있게 임연수를 발라 먹지만 그래도 어딘가 허전하다. 우리 셋 모두가 공허한 건지도 모르겠다. 식구라는 단어에 '먹을 식'과 '입 구'가 있는 것을 보면 식구의 빈 자리는 무언가를 먹을 때 가장 커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연인으로부터 고마운 말을 들었다. 연인의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오이소박이를 무쳐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당시 내면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오이소박이 가지고 행복해지고 충만해지다니. 농담 같은 일이었다. 아직 받지도 않은 오이소박이로 인해 엄마의 빈자리와 내 안의 구멍이 잠시나마 채워지다니. 엄마란 대체 무엇일까? 밑반찬을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반면 엄마 때문에 블랙홀 같은 공허함도 느껴진다.
붕어빵, 블랙홀, 그리고 오이소박이
이것이 엄마인지도 모르겠다. 오이소박이를 생각하면 엄마가 떠오른다. 아니면 엄마는 붕어빵일지도 모르겠다. 추운 겨울 따뜻한 붕어빵을 먹고 싶을 때 항상 같은 곳에 서 있던 붕어빵 점포. 어느 날 그 점포가 닫혀 있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죽은 엄마는 마치 닫힌 붕어빵 점포 같다. 없어져야 비로소 빈자리를 느끼니까.
지금 내 가슴에는 핫케익만한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블랙홀 같은 구멍을 평생 지닌 채로 살아갈 수도 있다.
고독히 홀로 사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완전히 채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속이 가득 찬 오이소박이나 붕어빵처럼 말이다. 죽은 엄마는, 오이소박이로 여전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