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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Oct 11. 2022

잠깐만, 그래 우리 잠깐만

그림책『엄마, 잠깐만』

중학생 때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만원 버스를 두 번이나 보내고, 기다리다 지쳐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버스로 20분 남짓 떨어진 거리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혈기 왕성한 중학생이었으니까 가능했다. 가방이 무겁고, 다리가 아파도, 친구와 함께라면 재미있었다. 꼬불꼬불 언덕을 넘고 빙글빙글 교차로를 지나 3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친구와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다. 바로 “잠깐만”

     

나는 친구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여기 이 나무들 봐봐. 이런 길이 있었나?”

“우와~ 엄청 예쁘다. 여기 담벼락이랑 딱인데!”     

플라타너스가 줄지은 거리는 우리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골목에 위치해 있어 버스를 타면 보이지 않는 곳이었기에 평소에는 잘 몰랐던 길.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가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나무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못 보던 팬시점 앞에서 친구가 날 불렀다.

“잠깐만, 여기 예쁜 거 엄청 많다~ 우리 여기 들렀다 가보자~~"

“우와 진짜!! 얼른 가자~”     

또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 가게를 나와 걸었다. 

그 순간 역시 들리는 소리는 잠깐만.



“잠깐만, 여기 우리 문화공연 숙제하러 왔던 곳이네~ 여기 위에 벤치 있는데, 쉬다가 가자”

“아, 거기 밤에 봤을 때 엄청 멋졌는데. 그래! 다리 아픈데 좀만 쉬다 갈까?”     

원래 1시간이면 도착했을 거리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리 길어진 건, '잠깐만' 때문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작고 작은 것들이 아름답고 소중하고 궁금했다. 눈에, 머리에, 마음에 꼭꼭 담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작고 작은 것들에 시도 때도 없이 잠깐만을 외치던 소녀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아이의 잠깐만을 견디지 못했다. 빨리 해라, 얼른 해라 잔소리를 쏟아붓던 그런 내게, 잠깐만을 외치던 중학생 소녀를 다시 데려와 준 그림책이 있다. 앙트아네트 포티스의 <엄마, 잠깐만>. 




표지에는 엄마와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간다. 엄마는 앞을 향하고 아이는 뒤를 보며 엄마 손에 이끌려 걸어간다. 아이의 시선이 머무는 뒤쪽에는 고양이들이 줄지어 있다. 속지에도 엄마와 아이의 시선은 엇갈려 있다. 아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지만 엄마의 발은 앞을 향해 내딛는 그림이다. 어찌도 이리 현실적으로 담아놓았는지. 시작부터 괜히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아 뜨끔한다.    


  

그림책 속 엄마는 연거푸 시계를 들여다보고 휴대폰을 확인한다. 그리고 계속 같은 말만 이야기한다.     

“빨리 가자, 빨리 가자니까!”     

그에 맞서는 아이는 이렇게 외친다.      

"잠깐만"     

세상에는 궁금한 것들도, 신기한 것들도, 느껴보고 싶은 것들도 참 많기 때문에 아이는 잠깐만을 외친다. 오리의 주식이 식빵이었구나, 오리에게 식빵을 주면 어떤 느낌일까? 직접 느껴보고 싶다. 무지개 맛 아이스크림은 무슨 맛인지 궁금하고, 물고기와 하나가 되어 뚫어져라 바라보는 수족관은 아이에게는 헤엄쳐 보고픈 신기한 세상이다. 


하지만 엄마는 비가 오니 더 급해진다.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 갑자기 내리는 비라니... 엄마로서는 최악의 날씨가 아닐까. 엄마 맘을 모르는 아이는 비가 와서 더 신이 낫겠지만 말이다. 지금 놓치면 떠나버릴 지하철 앞에서, 더 조급 해지는 엄마를 아이는 간곡히 붙잡는다.     

“엄마, 진짜 진짜로 잠깐만요.”     

그제 서야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엄마. 드디어 아이와 엄마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무지개다. 무지개를 보며 엄마는 아이와 같이 말한다.     

“그래, 우리 잠깐만....” 


    

그림책을 읽고 나서 뜨끔했던 장면이 있었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우산 쓴 어른들의 시선은 모두 앞을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반면, 아이는 뒤를 보고, 옆을 보고, 위를 보고, 아래도 본다. 사방을 샅샅이 둘러보고 탐색한다. 작고 하찮은 것에 시선을 두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 의미를 부여한다.


     

엄마가 되고 나서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더 바빠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몸 하나만 간수하면 됐는데, 아이라는 존재가 ‘원 플러스 원’처럼 언제나 붙어 다니게 되었으니,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느낌이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하지만, 앞만 보고서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없다. 운전할 때를 생각해보면 다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직진만 해서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없지 않은가? 좌회전도 하고, 조심조심 살펴 우회전도 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또 잠시 여유를 가지고 쉬어가기도 해야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것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느 여름날, 저녁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상다리 부러지게 먹지도 않았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때마침 띵 띠리 리리 ~ 세탁기도 나를 부른다.(사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소리 중 하나다. ㅇㅈ사장님 죄송합니다) ‘얼른 오셔서 꺼내 가세요. 늦게 오시면 아마 또 돌리게 될 거예요~!’하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땀에 붙은 고무장갑을 벗고 세탁기로 갔다. 빨래를 한 아름 안고 거실로 나오는데, 창가 쪽에 놓아둔 해먹에 누워 장난치던 아이들이 외친다.



“엄마, 잠깐만~~”     

“엄마, 이리 와봐~~”

나는 귀찮음을 치덕치덕 발라 답했다.

“왜에~ 엄마 일 많아. 빨래 널어야 해~”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한다.

“잠깐만, 잠깐만이면 돼. 이리 와 봐 봐”

아이들에게 눈을 흘기며 다가갔다.

“엄마, 하늘 봐봐. 대박이지?”

잔뜩 인상 쓰며 걸어갔는데, 오묘한 색의 하늘이 내 맘을 스르르 녹였다. 노란색과 보라색이 한껏 어우러진 하늘은 일상에 지친 내게 위로를 보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잡아끄는 손길에 나도 거실에 설치해놓은 해먹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 셋이서 한참 하늘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비록 집안일은 여전히 쌓여있었지만, 잠깐이나마 아이들과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긴 시간이 아니어도 된다. 아이들의 ‘잠깐만’이라는 세상으로 함께 가보자. 20년 전, 30년 전, 세상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어 하던 그 소녀를 소환해, 잠깐만의 여유를 만끽해보길. 


아주 잠깐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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