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집>을 읽다가 쓰는 나의 술피소드

상처에는 소주로 소독하는 게 제일이지.

by 책닮녀

어떤 책을 살까? 고민하던 와중에 아무튼 시리즈가 눈에 띄었다. 『아무튼, 아이돌』,『아무튼, 스웨터』,『아무튼, 양말』어떻게 이런 소재로 책 한 권을 쓸까? 신박함을 감출 수 없던 그때, 하지만 무엇하나 탁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던 그때, 방정맞은 이 손을 멈추게 하는 눈에 띄는 제목 하나.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아무튼, 술집』

하하. 아직까지 신발을 놓고 나온 적이 없어 다행이면서도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못썼나라는 생각과 함께 책을 집어 들었다. 기억도 마음도 놓고 나오는 그곳이 술집이 맞지 암요 암요 하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은 제목이 8할 아니던가. 제목에 이끌려 홀린 듯 돈을 지불하고 가방에 고이 모셔 집으로 데려왔다. 별생각 없이 쉬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책인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갔던 그 술집의 이름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그 사장님의 이름이 뭐였더라 곱씹게 되고, 안주 무식자들의 고갈비 사건에 피식 웃음이 나고, 첫 낮술을 즐기려고 방문했던 허름한 김치찌개 집의 공기가 훅 코끝으로 들어온다. 아무튼, 나를 스쳐갔던 술집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몇 장을 채 넘기지 않았는데,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게 하는, 나의 술피소드를 풀고 싶게끔 만드는 글을 만났다.


p.27
공기에 알코올이 떠도는 술집 특성상 언제나 구더기 같은 문제가 굼실거릴 가능성은 충만하다.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액땜이다! 구더기를 한번 만들어보면 언제 어떻게 해야 구더기가 발생하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가벼운 곤란을 미리 겪어봄으로써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액땜 이론.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술 먹고 겪은 적당한 곤경. 소싯적 술 좀 마셨다는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땜질의 흔적을 끄적여 본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초반.

파릇파릇한 새내기 시절로 돌아간다.

대학 1학년 다이어리를 펼치면 3월은 1일부터 31일까지 술집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매일매일 주말까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이렇게 성실히 무언가를 했다면 분명 지금 나라를 구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말이지 열심히 술집에 갔었다. 둘이서도 가고, 셋이서도 가고, 여럿이서 가기도 했다. 나름 12시라는 엄격한 통금이 있었던 나는 언제나 6시부터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했다. 언제나 시작은 사랑하는 맥주로 시작하지만, 돈 없는 새내기였기에 결국에는 선배들에게 질척거리기 일쑤였고, 선배들은 배만 부른 맥주를 왜 먹냐며, 인생의 참맛을 아는 어른이 되려면 으레 소주를 먹어야 한다는 말이 안 되는 논리로 깡소주(새우깡과 소주)를 사주곤 했다. 지금은 맥주 1캔 먹으면 나가떨어져서 화장실 변기를 옛 연인처럼 붙잡고 껴안아야 하는 영 형편없는 주량의 소유자가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시고 비우고 마시고 비우고(어쩌면 그때부터 최신 트렌드인 비우기를 잘했는지도 모른다)를 반복하며 끝까지 술자리에서 살아남았다. 웬만해서 기억은 잘 놓고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몸뚱이가 말을 안 듣는, 운동신경 제로인 나는 항상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날도 무진장 채비(채우고 비우는 지속적인 술자리를 위한 건강한 화장실 문화)를 많이 했었다. 가득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또 비우며 정신줄만은 놓지 않으리라 부여잡고 있었는데, 그만... 몸줄은 내팽겨쳐버린 것이다. 술만 먹으면 뒷덜미를 잡고 달리는 한 선배는 그날도 나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달리기를 했고, 선배보다 키가 작은 나는 목도리도마뱀 마냥 붙잡혀 가다가 아스팔트에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매번 넘어지는 나이지만, 인중 옆으로 살갗이 까지고 상처가 났다. 상처야 며칠 뒤면 괜찮아진다며, 덧나지 않으려면 소주를 먹고 소독을 해야 한다며, 내일 소독을 하러 가자는 이야기를 하며 헤어졌다. 술 먹고 넘어지면 뼈도 안 부러진다는 희한한 명언을 날리며 괜찮겠거니 다들 흩어졌었다. 그리고 다음날 부여잡고 있던 정신줄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거울을 마주하니, 상처도 상처지만, 앞니가 살짝 깨졌다. 이런.

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술을 마셔서 그런 게 아니라는 단지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럴 뿐이라는 무언의 변명을 눈으로 늘어놓으며 병원으로 갔다. 약간의 처치로 더 이상 깨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렇게 나의 땜질은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지는 듯했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아이스크림을 앞니로 앙 베어 물었다. 꽝꽝 얼어있던 아이스크림의 힘 때문에 살짝 붙여 놓았던, 세월의 흔적으로 이미 닳을 때로 닳아 있었던 앞니는 다시 떨어져 나갔다. 그 이후로 나는 3개월마다 치과에 가서 눈총 아닌 눈총을 받으며 땜질을 하고 있다. 햄버거, 핫도그, 닭다리 앞니로 앙 베어 물어야 제맛인 요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통보했다. 몇 번 시도했다가 곧바로 영광의 땜질을 당할 테니까.


그렇게 노심초사 앞니를 쓰지 못하고 살아감에도, 그렇게 불편함을 감수함에도 불구하고,

술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상처에는 언젠가 새살이 돋아난다고 작가는 말한다. 피가 나고 터진 그곳에 빨간 약을 바르고 바느질을 하며 또 그런대로 살아가게 된다. 액땜의 흔적 때문에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속상하고 아파서 힘들기보다는 그 흔적을 보며 싱긋 웃게 될 때가 많다. 그래, 그때 즐거웠지 하며. 영광의 상처인 것을 하며. 이제 술 먹고는 뛰면 안 된다는 찐 교훈을 다시 되새기며. 술은 그렇게 언제든 빠져들어 깨지고 터지고 피나는 상처를 잘 봉합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술집을 읽으며

한 꼭지를 넘길 때마다 새살처럼 마구 솟아나는 나의 옛 에피소드들.

왠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술피소드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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