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름다움, 수학적 미학의 추구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오늘날 소음으로 가득하다. 과도한 장식, 자극적인 형태, 상업적 욕망에 휘둘린 건축물들은 시선을 끌기 위해 경쟁하듯 외친다. 시장주의의 광풍 속에서 건축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담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를 유도하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와 그의 제자 김종성의 건축은 침묵하는 언어로 본질을 상징한다.
그들의 작품—미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시그램 빌딩, 김종성의 경주 미술관, 대우재단 빌딩, 남산 힐튼 호텔(현 밀레니엄 힐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은 수평과 수직, 사각형과 그리드 체계로 구성된 절제된 미학, 합리적 질서, 보편적 언어를 통해 건축의 근원적 가치를 탐구한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살아있는’ 공간의 부재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는 지역성의 소멸은 그들의 한계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건축사의 조류에 반응하는 정통의 시각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던 한국 건축의 이단아 같은 김종성의 건축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스승 미스와 김종성의 건축에서 오늘알 현란한 시장주의 건축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절제된 품격, 합리적 구성, 보편성과 순수한 논리적 미학의 원형—와 그 한계, 그리고 이들의 유산 건축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수학적 논리로 구성된 절제된 아름다움
브랜드와 랜드마크의 과잉요구는 서울을 혼란스러운 자본의 아노미로 만들어 버렸다. 화려한 파사드, 불필요한 장식, 즉각적인 시각적 충격을 노린 디자인은 건축을 상품화하며 공간의 본질을 흐린다. 이 혼란 속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김종성의 건축은 ‘덜어내기’의 미학으로 침묵의 품위를 제시한다. 미스의 “Less is More”는 감정의 억제가 아니라 존재의 명료성에 대한 선언이었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강철 기둥, 유리 벽, 대리석 마감의 최소한의 요소로 구성된 공간에서 재료의 물성과 기하학적 질서를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 이는 건축이 외침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말해야 함을 보여준다.
김종성은 이 정신을 한국에 뿌리내렸다. 대우재단 빌딩의 알프스산 녹색 대리석과 트래버틴 마감은 재료의 본질적 질감을 강조하며 과잉을 배제한다. 경주 미술관은 낮은 수평선과 중앙 중정을 통해 자연광으로 공간을 채우며, 단순함 속에 깊은 사유를 담는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정제된 파사드와 아트리움은 천창을 통해 빛과 공간의 조화를 창출하며, ‘보여주는’ 건축이 아닌 ‘담아내는’ 건축을 실현한다. 이들의 절제는 양식이 아니라 윤리적 태도였다. 시장주의의 과잉과 휘발되는 트렌드에 저항하며,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품격 있는 건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현대 한국 건축이 잃어버린 본질 공간의 순수성과 인간의 경험을 회복하는 등대와 같은 메시지다. 사실 8,90년대 반복된 그의 건축 언어에 식상한 많은 건축계 사람들은 속된 말로 '우려먹는다'라는 폄하를 했지만, 그건 김종성의 디테일과 섬세함을 보지 못해서다.
일견 유사해 보이는 외형이나 자세히 보면 치밀한 수학적 미학으로 접근한 디테일의 끝없는 변화와 노력을 발견하게 된다. 건축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건축의 형식이 내밀화되어 내부화까지 이어지는 일체성으로 건축가의 철학적 근거로 삼는다면 그의 작품들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더구나 일관성이 부족한 한국 건축계에서 40년정도의 시간을 지속적인 중심성을 가지고 디자인해온 그의 노력은 절대 폄하되어선 안된다. 사실 지나치게 외면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합리적 구성
현대 한국 건축은 급박한 공사 일정, 예산 제약, 복잡한 기능 요구로 인해 비효율성과 자원 낭비에 시달린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미스와 김종성의 그리드 체계와 수평-수직의 명료한 구성은 실용적이고 윤리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미스의 시그램 빌딩은 규칙적인 그리드와 모듈러 시스템으로 구조적 안정성과 공간의 유연성을 동시에 달성하며,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논리에 부응했다. 이는 미학적 선택을 넘어, 자원을 최적화하고 건축 과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합리적 접근이었다.
김종성은 이 원칙을 한국의 맥락에 적용했다. 남산 힐튼 호텔은 경사진 대지를 활용해 수평적 로비와 수직적 매스를 조화롭게 구성하며, 기능적 동선을 최적화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트래버틴 바닥과 대리석 파티션은 규칙적 모듈로 공간의 질서를 확립하며, 제한된 자원 속에서 최대의 가치를 창출한다. 경주 우양미술관의 중정 구성은 전시 공간의 효율성과 미학적 투명성을 동시에 구현한다. 이들의 건축은 단순히 아름다운 구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과 자원의 조화로운 조직화를 추구했다. 시장주의가 초래한 비효율성과 낭비에 직면한 현대 건축에, 미스와 김종성의 합리적 구성은 건축이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적·사회적 행위임을 상기시키며, 지속 가능한 건축의 길을 제시한다.
보편성과 지역성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은 특정 장소나 문화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 언어를 추구했다. 그의 판스워스 하우스는 기하학적 추상성과 유리의 투명성으로 지역성을 초월한 공간을 창출하며, 전 세계 어디서나 소통 가능한 건축적 담론을 형성했다. 김종성은 이 보편성을 한국의 산업화 시기에 접목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건축을 구현했다. 대우재단 빌딩의 물성 선택은 고급스러운 보편적 이미지를 강조하며, 남산 힐튼 호텔은 글로벌 호텔 체인의 기준을 서울의 맥락에 맞게 재해석했다.
그러나 이 보편성(universal)은 지역성의 소멸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미스와 김종성의 건축은 인간적 감성과 장소의 고유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판스워스 하우스는 미학적으로 완벽하지만 거주자로서는 비현실적이며, 인사동 선재미술관은 지역의 역사적 기억을 적극적으로 품지 못했다. 김종성은 한옥의 개방적 평면이나 한국적 공간 감각을 부분적으로 참고했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미시안 모더니즘의 틀 안에서 작동한다. 이는 1970~80년대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서구화가 현대성을 우선시한 시대적 맥락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성의 작업은 서구 모더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기후, 도시 맥락, 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한 ‘조용한 번역’이었다. 경주 우양미술관의 중정은 한국의 자연광과 기후를 반영하며, 서울역사박물관의 채광 처리는 지역적 맥락을 미묘하게 조율한다. 이는 한국 건축이 글로벌 무대에서 소통하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다.
의외로 그의 건축에서 발견되는 장소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색은 존재했었다. 그 예가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경희궁터의 역사성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며, 한국의 도시적 요구에 부응하는 보편적 공간을 제시했다. 사람들이 건축에게 요구하는, 소위 루이스칸 식의 질문으로 묻는다면 건축물에게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고 했을때, 김종성의 대부분 건축은 업무시설이었다. 당연히 업무시설 답게 사무공간의 기능성이 우선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공장이나 체육관 학교등 건축은 그런 사회의 요구에 답을 한 것이었다. 반면에 서울역사박물관에게 다른 질문을 한 것이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는 사회의 질문에 김종성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 놓은 것이다.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가구구조를 현대식으로 재 해석하고, 조경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배치와 구성을 해보았다. 공간의 서정감 있는 이동과 시퀀스를 만들어내력 했고, 김종성이 해석하는 수학적 논리를 조선시대 건축의 패턴으로 재해석 하려 했다. 아마도 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본다면 그의 건축에서 보편성이 중심이긴 하지만 지역성을 완전히 외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운 개인적 기억이 있다.
아마도 80년대? 90년대 였을 듯 한데, 이태원 상가 가로에 대한 김종성 건축가의 계획안은 당시로서 충격적이었다. 이태원 가로를 한옥들로 제안한 것이다. 가장 기하학적이고 서구적 보편적 언어로 디자인 하는 그가 한옥을 동원해서 이태원 가로 를 재구성한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당시의 건축계는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가장 모던한 건축가가 가장 전통적 건축을 제안했다는 것이 의외었으나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해보면 김종성 건축가의 치밀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관찰에 의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건축을 다시 천천히 들여다 보면서 스승 미스 반 데 로에와 유사한듯 하나 다른 길의 모습이 발견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읽어야 한다.이런 이유로 지역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모색하는 건축가들에게 김종성의 작업은 보편적 언어를 통해 지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한계와 성찰
미스와 김종성의 건축은 ‘차가운 완벽함’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들의 추상적 공간은 인간의 감정적 경험과 장소의 내러티브를 간과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들의 기능주의가 ‘살아있는’ 공간을 창출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지역성과 감성을 회복하는 ‘따뜻한’ 건축을 제안한다. 한국의 경우, 많은 건축가들은 한옥의 공간적 원리와 지역적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후속 노력은 미스와 김종성이 열어놓은 모더니즘의 언어와 질서 덕분에 가능했다. 그들의 그리드 체계와 절제된 미학은 한국 건축이 본질을 탐구하고 체계적 담론을 형성하는 출발점을 제공했다. 그들의 불완전함은 현대 건축가들에게 인간과 장소를 연결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게 하며, 건축의 성찰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한국 건축은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하나는 시장과 트렌드에 순응해 즉각적 소비를 부추기는 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견디며 인간과 장소에 책임지는 건축이다. 미스와 김종성의 건축은 후자를 향한 등대다. 그들의 수평과 수직, 그리드 체계는 형태로 외치지 않고, 구조로 말하며, 침묵 속에서 존재의 깊이를 조율한다. 이는 건축이 단순히 짓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담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소통하는 예술적·윤리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시장주의의 소음 속에서, 미스와 김종성의 건축은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묻는다. 과잉의 도시를 정화하고, 비효율성을 극복하며, 보편성과 지역성 사이에서 조용한 통역자가 되는 것
이것이 현대 한국 건축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들의 그리드는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은 시대와 건축가의 윤리에 달려 있다. 미스와 김종성의 유산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재를 헤쳐나가고 미래의 건축적 가치를 모색하는 등대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 건축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고 답해야 한다.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김종성의 건축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현대 한국 건축에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절제된 미학은 상업적 과잉에 저항하며 품격을 회복하고, 합리적 구성은 비효율성에 맞서 지속 가능성을 제시한다. 보편적 언어는 지역성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글로벌 시대의 소통 가능성을 열었다. 이들의 건축은 시장주의의 소음 속에서 침묵으로 존재하며, 건축의 근원적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미스와 김종성의 유산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묵직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