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적 아나키스트 차운기

차운기의 디자인이 교외 수많은 음식점 건축의 표준이 되었었다.

by 홍진

북촌으로 유명한 옥인동에 약속이 있어서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골목길을 돌다 보니 어디선가 본 건물이 있다. 우리나라 건축에선 거의 보이지 않는 선들과 임의적 구성들. 뭐라고 할까? 내가 8,90년대 우연히 보고 이 사람 뭐지 했던, 기억 속의 그 건축가 작품이었다.

흔하디 흔한 벽돌과 화강석이 혼재된 적당히 지어진 동네. 다세대 또는 다가구 주택들이 빼곡해서 골목길이 비좁게 느껴지는 오래된 동네의 한편에 중2병 반항가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건물. 그 또한 세월이 지나 회벽 위로 덩굴이 타고 오르고, 기이한 각도의 창들이 솟구쳐 있다. 가끔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는 예술혼들을 만나는데 이 건물이 딱 그렇다. 어떤 책에서는 그의 건축에 한옥 운운 하지만, 나는 그건 사실 잘 모르겠고, 감정의 응집체 같은 디자인이다. 그런데 묘하게 서늘한 사이코보다는 왠지 모를 인간적인 허술함과 아스라함이 있다. 이 낯설고도 따뜻한 건물, 그것은 '기억되지 않는 도시' 속에서 직관과 감성으로 지어진 하나의 시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차운기라는 사람이다. 완전한 건축계 비주류. 그의 이력을 보면 마지막 김중업선생 사무실에 근무한 것이 나오는데, 그 영향일까?

차운기는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감성적 직관에 기반한 조형 언어를 구축해 온 인물이다. 그의 건축은 이성적 계획이나 기능주의의 논리보다 감각과 경험의 흐름을 따라가며, 일상 속에서 잊히기 쉬운 감정의 층위를 물리적 공간으로 실현한다. 그가 설계한 이 건물(사진 속 주거복합건물로 보이는 작품)은 단면부터 평면, 입면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건축 질서와는 거리를 둔다.

구조는 비정형적이다. 콘크리트 벽은 마치 손으로 짜 맞춘 블록처럼 표면감이 살아 있고, 중간중간 삽입된 목재와 징검다리처럼 튀어나온 금속 캐노피는 기능적이라기보다는 시적 장치로 보인다. 창문은 결코 정중앙이나 대칭을 이루지 않으며, 오히려 사용자의 눈높이와 사연에 따라 그 위치를 바꾼 듯 보인다. 이처럼 차운기의 건축은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장소와 사람, 자연과 상호작용한다.

아무리 봐도 그의 건축은 철저한 직관적 건축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건축은 철저한 계획과 수치, 구조의 정밀함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차운기의 건축은 계획보다 감응에서 시작된다. 현장을 밟으며 대지의 결을 느끼고, 건축주의 삶을 듣고, 그 감정의 조각들이 물리적 형태로 흘러나오는 방식이다.

그 결과물은 예측할 수 없다. 평면도는 정형화되지 않고, 재료의 사용은 비정형적이며, 마감은 완결보다는 흐름을 택한다. 마치 한 편의 음악이 멜로디로만 설명될 수 없듯, 그의 건축 역시 단순한 구조나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살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사진 속 건물의 상단부를 보면, 지붕의 곡선은 한옥의 추녀선처럼 부드럽게 하늘을 향한다. 그리고 길게 찢어진 듯한 삼각 창문은 수직선을 따르되, 중간중간 엇비슷하게 비껴간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내부에서의 시선, 외부에서의 조망, 그리고 주변 건물의 시선을 피하려는 정서적 방어기제가 이곳에 모두 결합되어 있다. 이처럼 그의 건축은 실용성과 감정의 균형 위에 서 있다.

차운기의 건축은 어디까지나 ‘도심의 틈’을 대상으로 한다. 넓은 대지나 대규모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래된 도시의 헌 집, 골목, 무표정한 콘크리트 사이에서 그의 작업은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그의 건축은 언제나 작은 목소리를 지닌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는, 귀 기울이면 들린다.

그는 현대 도시가 잊고 있는 ‘건축의 낭만’을 회복한다. 그 낭만은 미화된 과거가 아니다. 오히려 도시의 속도, 경제성, 법규, 효율성에 밀려 사라진 ‘공간과 삶 사이의 서정성’을 다시 부르는 소리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노출 콘크리트, 목재, 녹슨 철재)는 모두 ‘무겁지 않은 진정성’을 담는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낡고, 때론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에 자리를 내준다.

사진 속 건물 역시 그런 태도를 보여준다. 콘크리트 벽면은 이미 몇 년간의 풍화를 견디며 담쟁이넝쿨의 집이 되었고, 창문틀은 시간이 스며든 목재다. 바람, 비, 이웃, 사람, 고양이 — 이 건물은 그 모두에게 조금씩 자신의 외벽을 내주며 스스로를 완성해 간다.


이런 류의 건축을 표현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 구분해 보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말년 스튜디오에 있었고, 독창적인 건축을 보여준 미국의 건축가 브루스 고프처럼 강렬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을 시각적 외피로 이어져서 다소 기괴한 느낌도 주었지만, 형태적 특이함과 내용은 다르다. 또한 이탈리아의 파올로 포르트게시 역시 합리주의적이면서 구조적 건축을 추구했지만 형태에 사용된 다양한 선들과 유선형으로 인해 이런 직관적 형태 미학의 지향을 느끼게 해주는 건축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런 류의 건축가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직관적 형태론으로 건축을 표현하는 이로 문훈을 예로 들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문훈의 건축도 직관성이 있지만, 건축의 형태구축에 있어서는 즉흥성보다는 논리적이다. 이런 건축가들의 분류를 아무리 해도 차운기는 상당히 과감할 정도의 직관성과 감정선으로 건축을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과감한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축가들과 비교할 때, 차운기의 작업은 한층 더 내밀하고 조용하다.

그는 키취적 표현보다는, 섬세한 감정의 배려를 택한다. 그러나 때로는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기묘한’ 장치들이 출현한다. 이를테면 이 건물의 돌출형 창문, 처마 밑의 금속 캐노피, 마치 새가 앉아 쉬다 날아오를 듯한 지붕선.

특히 차운기가 선보인 옹이조각들을 지붕에 올리고, 마치 둥근 삿갓이 집 전체를 덮은 듯한 지붕선의 건축은 우리나라 90년대 교외 음식점들의 표준건축에 가깝게 전국적으로 유행했고, 카피건축이 사방에 들어섰었다.

이것은 키취라기보다 은밀한 유희에 가깝다. 어린아이가 비에 젖은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듯, 차운기는 엄격한 도시 규칙과 시선 사이에 작은 장난을 숨겨둔다. 그의 건축은 “모두가 알아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조금은 이상하지만 오래도록 눈에 밟히는 건축”이다.

우리는 흔히 도시의 건축을 '기능'과 '효율', '밀도'로만 평가한다. 그러나 도시는 사람의 삶이 스며든 ‘감정의 집합’이다. 차운기는 이 도시의 감정을 짓는다. 그것은 '성공적인 건축'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의 건축은 경쟁력이 없다. 그러나 다정하다. 비싸 보이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도시란 곧 기억이고, 감정이며, 이야기라는 것을. 그의 건축은 그 이야기의 중간에 ‘쉼표 하나’를 찍는다. 오래된 벽돌 사이에 끼운 나무 조각처럼, 회색 도시의 음표들 사이에 넣은 하나의 멜로디처럼.

차운기의 건축은 한국 건축에서 주류적 논리성과 합리성에서 이탈한 ‘감성적 회복’을 실현한다. 그것은 부르스 골프가 말한 유기적 건축의 원류를 한국의 정서로 다시 풀어낸 결과이자, 비정형과 직관, 감각과 즉흥을 통해 공간을 살아있는 존재로 되돌리는 시도다.

옥인동 다세대 주택들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단절 사이에서 '말을 거는 건축'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우연히, 당신의 시선을 멈추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건축만이, 마음속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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