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도 리브어보드 여행기
인도네시아 코모도에서 마음 맞는 스쿠버 다이빙 크루들과 5박 6일 간 배 위에서 먹고 자고 마시며 다이빙하는 Live-abord 풀 차터를 예약한 지로부터 1년이 지나갔고, 마침내 승선 날짜가 다가왔다. 도합 20시간에 가까운 다이빙의 모든 순간을 4K 화질의 영상으로 기록하고자 1 테라바이트 SD카드와 고프로 배터리 4개를 준비했지만, 처음 몇 번의 다이빙 동안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감에 나는 이내 영상 촬영을 내려놓게 됐다.
감각을 총동원해 생동감 있는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존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멋진 순간,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우리는 사진을 비롯한 영상이나 글귀, 기억 등에 순간을 담는다. 그러나 현존의 빛을 통해 체험되던 순간을 보존 가능한 형태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기계화와 언어화는 충만하던 현재를 파편화해 불완전한 조각으로 밖에 담아내지 못한다.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이 담기지 못하기에 생명력을 잃고 껍데기만 보존되기에, 이는 박제에 해당한다. 애초에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 것은 그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역동하는 전율임에도, 그 핵심 알맹이를 제외한 겉표지만 그럴싸하게 담아내는 것이 최선이다. 지난날의 기록물들을 바라볼 때 소생되는 것은 불완전한 반쪽짜리 감동이며, 그 마저도 어느 정도 작위적인 노력이 개입해 쥐어짠 신파 섞인 감동일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여러 형태로 순간을 박제하기 위해 애쓴다.
순간을 붙잡아 보존 가능한 형태를 부여해, 궁극적으로 그것을 ‘소유’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기에 박제야 말로 소유적 존재 양식을 낳는 요체다. 박제는 다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순간의 빛을 담아낼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점을 공유한다.
긍정적인 박제의 경우 인간에게 응당 필요한 추억의 생산이 주목적이며, 이 경우 7~8시간의 숙면, 풍부한 영양소의 섭취, 적절한 운동,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행복감의 원료로 삼는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하나의 정신적 영양소에 해당한다. 물론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자면 이러한 ‘긍정적’인 박제 행위 역시 초월적인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러나 이는 인간에게 모든 이념과 사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태도이기도 하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유신론자를 가차 없이 비판하여 그 과정에서 유연하던 사고가 경직, 신이 없음을 믿는 '종교적 믿음'이 탄생하고 이내 이념의 덫에 붙잡히는 양상과 유사하다. 즉, 양 극단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다는 점에서 이러한 근본주의적 태도 역시 '행복한 삶을 위한 실용적 차원의 지혜'에 해당하지 않는다. 때문에 육신을 타고난 인간이 언제 행복감을 느끼는지 이해하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조건을 수용하는 태도’는 오히려 근본주의적 태도에 비해서는 부처의 가르침에 가깝다.
부정적으로는, 자의식을 더욱 비대하게 만들고 자신의 가치를 빗댈 거울로서의 타인의 존재를 상정하는 박제 유형이 있다. 이 유형이야말로 내적 공허감과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부정적 피드백 관계의 한 축이요, 점점 더 척박해지고 인간미를 상실해 가는 현실을 그려낸 주범이다. 물론 멋진 영상 촬영물을 SNS에 업로드하고, 많은 ‘좋아요’를 받고,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행위 자체가 인류를 피폐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지속하게끔 만드는 의식의 상태야말로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대상이다(그 내적 공허감이 유발해 온 무궁무진한 사회적 문제들은 앞으로 짚고 넘어갈 계획이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고 인정이나 질투를 유발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공허감을 채우고자 하는 목적의 박제라면, 존재를 무겁고 둔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소유에 해당하며 이는 마실수록 갈증을 유발하는 바닷물처럼 자신의 내면에 공허를 더욱더 깊고 크게 만든다.
박제 행위의 근거가 정신적 공허감을 채우기 위함인지, 아니면 살아 숨 쉬는 시간만큼은 스스로를 건강하게 돌보고 가꿔야 할 애정의 대상으로 여겨 기꺼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주기 위함인지에 따라서, 겉보기에는 동일한 박제 양식의 행동을 보일지언정 정신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기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바닷속을 여행하며 지속적으로 내면에 떠올랐던 의문은 바로 내가 촬영 버튼을 누를 때, 나는 과연 이 둘 중 어떤 마음에 의해 움직이는 가에 대한 의문이었고, 결과물을 보고 감탄을 지어 줄 타인의 존재를 상정하는 마음이 한편에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감지한 순간 나는 촬영을 멈추었다.
바닷속에 잠겨버린 사막, 그 사막 위를 유유히 날갯짓하며 유영하는 앨버트로스를 조우한 경이와 전율은 그 어떤 말이나 영상으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물들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촬영 버튼을 누르게 된다. 내 호흡 소리와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고요한 바다에서 순간 평정심이 흔들린다. 마음속에서 일말의 흥분감이 생긴다. 얼른 찍어야 된다, 더 멋진 각도에서, 더 가까이에서, 더 자세하게.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내 시선은 오로지 카메라 화면에 고정된다. 내게 감동을 주었던 만타 레이를 보고 있는 것은 내 시선이 아닌 카메라 렌즈고, 나는 그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박제’되고 있는 화면을 바라본다. 그 영상은 움직이지만 죽어 있는데, 그 이유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살아있는 의식은 이미 지금 이곳, 현실이 아닌 이 영상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미래, 다시금 재생버튼을 누르며 기억을 되살리고 있을 미래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또, 살아있던 현실을 죽여 먼 미래를 위한 기억으로 박제함으로써, 자의식을 놓아버린 채 살아있다는 느낌이 선사하는 전율을 놓쳐버리게 된다. 우리는 모든 감동과 전율을 원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마주치게 되면 그것에 너무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집착해 그것을 죽이고 박제해서 주머니에 넣는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진열장에 전시하느라 바쁜 나머지 전율을 놓쳐버리기 일쑤이며, 그렇게 하나의 기억을 주머니에 담고 나면 그다음 희생 제물을 찾아 나선다.
깊은 바닷속을 탐험하다 보면 문득 이곳은 사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산소가 없을뿐더러, 언제든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함부로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광야와도 같다.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사막과도 같이, 물속은 자기 숨소리만으로 가득 차 있어 고요하다. 인간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광야에 있다 보면 어느새 ‘나’라는 자아 감각은 광막한 대자연의 품 속에서 서서히 녹아 없어진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성격을 지녔고, 어떤 국적과 종교를 가졌는지, 인간이 세운 이념과 규칙들, 온갖 소유물들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을 게워내고 나면 남는 것은 딱 하나,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있다는 사실. 나에게 말을 걸지도, 나로부터 어떤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은 채 살아있는 그 순간에 충실한 생명체들을 보고 있자면, 나 역시 그들을 닮아가 ‘나’를 조금씩 덜 의식하게 된다.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기어코 머릿속으로조차 할 말을 잃고 나면, 비로소 비워낼 수 없는 최후의 정체성이 남게 된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이 다양한 생명체들과 다를 바 하등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며, 그 생명이야 말로 내 정체성의 유일한 본질이라는 사실이 나를 둘러싼 물처럼, 모래처럼, 나를 서서히 점령한다. 그리고 그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영상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그 어떤 유형의 박제로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감각은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살아있다는 감각’이며, 그 감각이야 말로 우리가 여행을 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때 찾으려고 하는 보석과도 같은 순간이다. 우리의 의식과 주의력이 과거나 미래의 관념 세계가 아닌 온전히 현재에 집중될 때에만 찾아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의 감동을 놓치는 것이 아까워 카메라를 들이대고 펜을 쥐어들 때, 지금 이 시간과 공간 속에 무가 아닌 유로 존재한다는 단순한(그러나 곱씹을수록 기적적인) 사실이 주는 충만한 감동은 생동감을 잃게 되고, 박제는 바로 그렇게 빛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