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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 Lee Speaking Aug 18. 2024

우리는 '살고'있는가

아니면 그저 살아 움직이는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인식하던 나는 '나'를 인식하기 시작함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로부터 하나의 물방울로 떨어져 나온다.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의 탄생과 동시에, 그 주체로부터 '인식당할' 객체로서의 세계가 탄생했다. 나는 이제 내가 그린 자아 정체성이라는 경계선 속에 고립되어 세계를 경험한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에 투과된 세계, 즉 나의 해석을 통하면서 일부는 확대되고 일부는 축소되거나 아예 무시된 주관적 세계만을 경험한다. '나'는 이제 나의 입맛대로 세계를 취사선택하여 어떤 것은 수용하고 어떤 것은 거부하는,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방 속에 갇히게 된다.


스스로 경계선을 그리며 바다로부터 분리된 물방울은 세계를 경험해 가며 더욱 두터운 경계선을 세워나가고, 그렇게 하나의 얼음, 하나의 돌이 되어버린다. 예측을 불허하고 끊임없는 비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불확실성의 바다에, 원한 적 없음에도 던져진 영락없는 조약돌 신세다. 자신이 존재함을 인지하는 특이한 존재. 자연의 일부였다가 타자로 추방된 존재. 자신이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어제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내일도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간의 개념을 탄생시켜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선 위에 자신을 세워놓은 존재. 그 시간선 위에서, 인류는 관념 세계 속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특이한 감정을 발달시켰다.


자연 본래의 속성인 불확실성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중립적인 의미를 넘어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말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말처럼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하나의 질서에 대한 묘사가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는 어떠한 감정을 던져주는데, 그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다(소수의 개인에게는 스릴이나 기대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 역시도 애초에 두려움이 없다면 생겨날 수 없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경계선의 확립, 세계로부터의 분리, 경험을 거듭하며 더욱 두터워져 가는 자아 정체성으로 인한 고립. 고립이 깊어질수록 본디 불확실한 세계의 본성은 더더욱 포악하고 두려운 것으로 다가오며, 세계는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모했다.




인류는 불확실성으로부터의 도피,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를 원한다. 파도가 두려워 큰 덩어리로 뭉쳐져 군중을 이루어 낸 조약돌들은 세계가 조금은 확실해진 듯한 허황된 착각에 빠져 안정감을 누렸으나,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신의 타고난 색깔과 잠재력의 매몰로 인한 개성 상실은 그중 가장 작은 대가에 속한다. 거대한 섬에서 ‘스스로 탈출해 다시 바닷속으로 뛰어들기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너무 늦었다'는 합리화를 내세우며 자기 내면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끝끝내 마주하지 못한다는 점은 큰 대가다. 뒷걸음질 치고, 애써 외면하고, 고개 돌렸기에 긍정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삶.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것'은 가장 큰 대가다.


있는 힘껏 삶을 사랑해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지막 호흡의 순간에 주는 회한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회는 어차피 잠시 후, 마지막 호흡이 멎고 나면 사라지고 말 터이니, 잠시 후회하면 어떠랴. 불안과 걱정, 두려움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없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온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없었던 삶을 살았다는 점. 그렇기에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관계들로 삶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 안정감을 주던 그 섬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추구해 마땅했던 값비싼 재화들, 졸업장과 명패 따위의 상징물들은 사실 '내가 얼마나 바다를, 삶을, 날 것 그대로의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증명하는 척도에 불과했다는 쓰라린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은, 어차피 마지막 호흡이 멎고 나면 먼지처럼 사라질 터이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불확실성으로부터의 도피를 꾀한 인류는 무지개를 일곱 가지의 색으로 구획하듯,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경계선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토막 내고 틀에 가둠으로써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세계, 포근하고 모든 것이 안락한 세계에 발 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세계의 변덕과 혼란 속에서 일격의 파도에 무너져버릴 돛단배에 불과하다. 그 돛단배, 사람들과 뭉쳐서 만들어낸 섬은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을 주었지만, 그 대가로 삶을 앗아갔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바다를 자유롭게 탐험하고 무한한 스펙트럼의 색채를 만끽하며 내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충만하게 살아낼 가능성을 앗아갔다.


우리는 살아있는가? 우리는 움직이고, 말을 하고, 호흡한다. 우리는 박동하는 심장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적인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람과, 세계와 교류한다. 그러나 경계선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버린 주체들끼리의 '진실된 교류'가 가능한가? 서로 만나는 것은 인간대 인간인가, 혹은 정체성대 정체성, 경계선대 경계선인가? 이미지끼리의 교류, 관념적 주체끼리의 교류, 허상끼리의 교류에서, 인간적 만남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속에서 진정한 교류와 화합, 삶과 사람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찾아볼 수 있는가? 그저 물리적 시공간의 교차 속에서 피상적 실체끼리의 조우가 있었을 뿐, 그 속에는 어떠한 만남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세계의 충돌이라는 기적은 두려움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살아있지 못한' 움직임과 정열 없는 분주함, 즉 생명 없는 기계의 일생 같은 것은 아닌가? 기계의 유통기한이 다할 때, 죽은 것이 진짜 '죽음'을 마주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 죽어있던 것은 자신이 생명, 살아있는 것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에 몰려오게 될 회한은 어떠한가. 당신에게는 가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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